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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처마와 서까래가 돋보이는 퓨전 한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퓨전 음악, 퓨전 요리, 퓨전 문학 등등. 여기에 또 하나, 퓨전 건축도 있다. 서로 다른 공법과 재료들이 섞여 전혀 새로운 건축물로 탄생하고 이들은 우리 땅에 적응하며 점차 토착화된다. 동서양 건축의 장점들을 취합해 현대 주거의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는 길. 3채의 퓨전 주택 사례를 통해 그 건축적 노고를 함께해 본다.

이 집은 건축가 류춘수의 삼하리 주택<1986년>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졌다. 건축주는 10년 넘게 당시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마침내 지난해가 되서야 그 꿈을 완성했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 바른 터, 한국적 정서를 가득 품은 살림집 한 채가 낮은 품새로 앉아 있다.

한옥의 장점으로 천연 재료와 자연스러운 처마선, 온돌과 마루 등이 꼽힌다. 이 중에서도 서까래와 길게 늘어진 처마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옥 특유의 건축 구조이다. 긴 처마는 외적 아름다운 뿐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한여름에는 강한 빛을 가리고, 비나 눈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 겨울에는 집 안 깊숙이 볕이 드니 사계절 나무랄 데 없는 요소다. 건축주는 바로 이 점을 높이 샀다.

“최근 지어지는 계량 한옥들은 처마가 길지 않아요. 건축면적도 커지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은 긴 처마가 만드는 것이죠.”

처마 외에도 맞배지붕, 툇마루, 한식 창호 등 전통적 건축요소는 주택 전면에 드러난다. 집은 이렇게 한옥의 이미지를 표상하지만, 공법적인 면에서는 한옥과 다르다. 우선 철저하게 치목된 구조재를 가구식으로 짜 맞추고, 벽면은 서양의 투바이포 경량목구조 방식을 따랐다.

지붕은 기와 대신 싱글로 마감했다. 옥외마루는 대청과 데크의 중간쯤으로 전통무늬의 난간이 이를 에워싸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건축주의 깊은 고심이 배어나는 집이다.

현관 계단은 샌드스톤 질감의 타일로 마감하고, 입구에 `동락재`라는 현판을 달아냈다.
측면으로는 지하 공방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이 위치한다. 주택을 관통해 남서쪽으로 정자를 달았다.

평범한 재료로 평범하지 않게 지은 집

다양한 취미에 특별한 손재주까지 가진 집주인은 건축의 모든 과정을 직접 이끌었다. 10년 넘게 소목을 취미로 삼고 있는 그는, 마치 가구를 짜듯이 집을 지었다. 목공방에서 연을 쌓은 지인들과 건축업에 몸담고 있던 친구를 불러 여러 고견들을 들으며 반년의 시간을 건축에 매달렸다. 설계와 재료 수집에 오랜 시간을 쏟고, 공사가 시작되자 직접 땀을 쏟아가며 현장에 섰다.

“한달 가까이 치목을 하고 기둥 세우는 데만 보름이 걸렸지요. 주위 사람들은 ‘소목(小木) 하듯이 하면 집 못 짓는다’고 말렸지만,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 없더라구요.”

층고가 낮고 처마가 긴 집이라 기초는 높이 올렸다. 전통 한옥이 기단 위에 지어진 것처럼 습기도 피하고 조망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대신 지하공간은 작은 목공방과 안주인의 옻칠 작업실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곳은 남서쪽으로 밝게 트인 상태라, 지하실 전체로 볕이 통째로 들어온다.

주택을 조감한 모습, 창틀은 외부는 집한 밤색, 내부는 옅은 회색의 이중창으로 하고, 안쪽으로 아크릴 창호지를 바른 전통 띠살 문을 설치했다.

단순한 구조 속에 깃든 공간의 힘

집은 약 92㎡(28평) 면적의 본채와 부속 건물로 창고와 주차장이 딸려 있다. 기둥, 보, 도리, 서까래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에 적당한 비례로 창을 냈다. 다소 단순한 듯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치밀한 공간 구성과 디테일 처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자형 건물은 현관에서 출발해 반대편 정자까지 하나로 연결된다. 동선을 최대로 단순화해 쓸데없는 면적을 줄이고, 필요에 따라 공간을 분리할 수도 있다. 한옥의 칸 개념을 활용하되 생활의 편의에 맞춰 재해석한 대목이다.

서재와 주방이 마주보고, 안방은 전망이 좋은 남서쪽으로 배치했다. 주방에서는 다용도실을 통해 바로 정자로 이어진다. 따로 떨어져 있는 정자는 실제로 사용 빈도가 적기 때문에 집과 이어서 사랑방으로 쓰고 있다.

정자의 빗살무늬 난간은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아 주지만, 바람이 관통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국산 적삼목으로 만들어 촉감이 좋은 외부 공간.

“집은 최소한의 면적이면 됩니다. 더욱이 나이 들어 사는 집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꼭 필요한 공간에 꼭 필요한 물건만 놓고 살면 족하지요.”

거실 전면으로 이어진 옥외마루는 60㎡(18평) 면적이다. 습기에 강한 국산 적삼목으로 시공해 맨발로 걷는 감촉이 뛰어나다. 마루 난간은 집주인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것으로 40㎝ 높이로 낮게 제작해 누마루 난간을 연상케 한다.

난간 디자인으로 치자면 정자도 빼놓을 수 없다. 바람은 통하되 비는 가리고, 전망에도 방해되지 않는 독특한 난간은 빗살 형태로 탄생했다. 이곳은 ‘한가로이 달을 낚는다’는 ‘조월루(釣月樓)란 이름도 붙였다.

파우더룸은 욕실과 이어져 있다. 포켓도어를 설치해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편백나무를 이용해 직접 만든 책장 덕분에 집안 가득 나무향이 퍼진다.

마당과 화계에 표현한 한옥의 기품

원두막에서는 마당의 앞과 뒤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바로 텃밭이나 화계로 갈 수 있고, 이들은 다시 앞마당으로 연결된다. 집의 마당은 크게 자갈과 잔디, 화계로 나눠볼 수 있다. 전면의 마당 중 데크 아래는 3m 폭으로 깬자갈을 깔았다. 콩자갈보다 값은 싸지만, 걸을 때 나는 바스락 소리가 좋았다.

“자갈에 쓰레기나 낙엽이 떨어지면 쓸 수 없으니 허리를 숙여 주워야 합니다. 잔디도 잡초 뽑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지요. 이렇게 주택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대신 노동 끝에 이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어찌나 달콤한지요.”

현관에서 거실사이, 주방과 서재 사이에는 홍송으로 만든 띠살문이 있다. 칸막이 역할을 하지만 , 창호지로 막아 답답함이 덜하다.

지하 공방의 테라스에는 흔히 볼 수 없는 화계가 자리한다. 궁궐 뒷마당에 쓰였던 전통 정원의 요소를 끌어온 것이다. 스톤 블록을 이용해 층을 만들고 철쭉과 야생화들을 심어 가꾸고 있다.

이렇듯 집 뿐 아니라 마당까지 전통과 현대의 이미지들은 뒤섞여 있다. 한옥이 가진 기품과 기능성은 유지하되, 현대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한 요소들은 건축주의 치밀한 기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마음 에 10년간 있던 집은 이렇게 큰 아우라로 현실에 자리했다.

조인스 랜드· 월간 전원속의 내집 (취재 이세정·김수현, 사진 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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