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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대맛 라이벌] <34> 메기vs대구 매운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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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위 어떻게 선정했나

江南通新은 레스토랑 가이드북『다이어리알』이윤화 대표와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배한철 총주방장, 롯데호텔 무궁화 천덕상 셰프, 더플라자 허성구 총주방장, 맛집 파워블로거(비밀이야) 배동렬씨, 『주식9단 서울맛집 유랑』 저자 이영승씨 추천을 받아 5개 식당을 후보로 추렸습니다. 이후 후보 식당 5곳을 10월 22일자 江南通新에 공지한 후 일주일 동안 독자투표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메기대감과 은성회집이 각각 1,2위로 뽑혔습니다.

라이벌 (35) ‘보쌈’ 결과는 11월 26일 발표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주꾸미’ 투표 방법은 19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운탕은 생선을 넣고 고춧가루·고추장을 풀어 끓인 찌개입니다. 예전부터 붕어·쏘가리·메기 등 민물생선으로 주로 만들었다죠. 활어회를 먹은 뒤에도 남은 생선 머리와 꼬리, 자투리 살을 이용해 만든 매운탕으로 입가심을 할 정도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집은 재료도 분위기도 전혀 다른 맛집입니다. 한 곳은 민물고기 중에서 살 많고 맛 좋기로 유명한 메기 매운탕 끓이는 집입니다. 재래시장에 있는 다른 한 곳은 단백질 풍부한 대구 매운탕을 듬뿍 담아 내놓습니다.

매운탕엔 최기택 사장이 어릴 적 끓여먹던대로 메기·감자·호박 외에도 손님 건강을 위한 인삼, 국물맛을 내는 멸치·가당랑어포(가쓰오부시) 등 20여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문득 … 남들도 어린시절 매운탕이 그리울까봐

군것질거리도, 놀이문화도 별로 없던 시절. 시골에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가 막힌 놀이가 하나 있었다.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이나 어죽 끓여먹던 천렵(川獵)이 그것이다. 서울 양재동 메기대감은 최기택(66) 사장의 이런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는 집이다.

 “내가 충청도 시골 촌놈이야. 청주에 살면서 옥산초등학교를 다녔거든. 집에서 학교 가려면 미호천이라는 큰 냇가를 건너야 했어. 학교 오가며, 또 친구하고 놀러 거길 참 많이 갔어. 할 게 뭐 있나. 물고기 잡아 매운탕 끓여 먹었지.”

 냄비 하나와 된장·고추장만 달랑 들고 가서는 물고기 잡으면 주변 아무 밭에서나 감자·호박·고추·가지 등 채소를 몰래 따 썰어 넣은 매운탕은 그야말로 진수성찬 부럽지 않은 별미였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20~30대 때도 종종 부모님 뵈러 고향집 갈 땐 천렵하는 게 낙이었다. 당시 서울엔 민물고기 매운탕 하는 식당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문득 서울엔 나처럼 시골 출신이 많을 텐데, 그 사람들도 나처럼 이런 걸 먹고 싶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한번 만들어 팔아보자고 결심한 거지. 서울에 고깃집이나 횟집은 많아도 민물고기 매운탕집은 별로 없으니 경쟁력이 있겠더라고.”

① 최기택 사장. ② 살 많고 맛 좋은 민물고기인 메기가 통째로 들어간다.

 1994년 식당 문을 열기 전 그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가게 자리는 일부러 사람들이 물고기 잡고 놀던 양재천 근처에 잡았다. 지금 가게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이었다. 처음부터 민물고기 중 가장 살이 많은 메기매운탕만 팔기로 하고, 메기수염에서 영감을 얻어 ‘메기대감’이라고 이름 지어 상표등록까지 일찌감치 마쳤다.

 “사실 나한테 메기는 굉장히 귀한 고기였어. 잘 안 잡혔거든. 가끔 메기 잡으면 친구들끼리 난리가 났어. 산삼 보고 ‘심봤다’ 외치는 것처럼 말이야. 어느 날 가락시장에 갔더니 양식 메기가 엄청 많더라고. 그래서 메기매운탕 딱 하나만 파는 전문점을 차린 거지.”

 메기매운탕 단일 메뉴다 보니 맛이 더 걱정이었다. 자신이야 옛 추억 대로 고추장과 된장만 풀고 채소 몇 개만 썰어 넣어도 맛있지만 이런 추억 없는 일반 대중이 과연 좋아할까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그래서 식당 문 열기 전에 맛 연구에 돌입했다. 여러 재료를 넣고 빼기를 반복하다 멸치와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를 한번 넣어봤더니 국물 맛이 훨씬 부드럽고 담백했다. 하지만 여전히 민물고기 특유의 흙 냄새는 잡히지 않았다.

 “정말 별별 재료를 다 넣어가며 수백 번 끓였는데 마음에 안 들더라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꿈에서도 헤매면서 이 약초 저 약초를 넣더라니까. 그렇게 6개월을 고생했지.”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답을 찾았다. 어느 날 밥 먹고 남은 반찬을 치우다가 ‘번쩍’했다. 혹시나 하고 넣었더니 냄새도 제거되고 맛도 훨씬 좋아졌다. 최 사장은 해산물인 이 재료에 양념을 더해 메기대감 맛의 비결로 만들었다.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가게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손님이 몰렸다. 맛도 맛이지만 밀가루 반죽이 성공 요인 중 하나다. 이 집에선 식당 한 켠에 밀가루 반죽을 두는데, 손님은 원하는 만큼 가져다가 수제비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옛날엔 쌀·보리가 귀해서 매운탕을 끓여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어. 밥은 없지, 배를 다 채울 만큼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어. 이 생각이 난 거야. 시골사람인 내 눈엔 당시 서울은 모든 게 돈으로만 통하는 각박한 곳이었어. 내 가게에서만큼은 다들 배불리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밀가루 반죽을 공짜로 무한대로 주는 거야.”

 식재료를 직접 만지고 만들어 먹는 게 낯설 법도 하지만 최 사장의 천렵 추억을 전해들은 손님들은 “그땐 그랬지”라며 너도나도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어쩌다 같이 온 아이들은 밀가루 반죽을 더 재미있어 한다. 하지만 고민도 있다. 무료다 보니 손님이 반죽을 많이 가져갔다 다 못 먹고 남기는 경우가 많다.

 “다른 집보다 음식쓰레기가 많이 나오지만 재미있게 실컷 먹을 수 있으니 감수해야지.”

 돈만 벌겠다는 게 아니라 고객과 함께 즐기듯 장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작은 축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개인적 사정 때문에 중학교 때 축구선수를 그만뒀지만 지금도 축구라면 가슴이 뛸 정도로 좋아해.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한다니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 게다가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이겼잖아. 경기가 끝나자마자 현수막 업체에 전화해서 ‘월드컵 첫 승 기념 무료’라는 현수막을 만들고는 그 다음날 아침 10시에 식당 앞에 걸었어. 시간이 너무 늦어 안 된다는 걸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만들어 달라고 했어.”

 다음날 가게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몰렸다. 하루 평균 손님 400여 명을 훌쩍 넘어 600여 명이나 왔다. 손님이 많을수록 손해가 컸지만 기분은 좋았다. 원래 한번만 하려고 했지만 또 해달라는 손님 요청에 ‘우리나라 승리시 공짜’ 이벤트를 또 했다.

 “그땐 큰 TV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60인치 정도 TV를 빌려와서 손님이랑 경기가 같이 봤어. 한국이 이기면 무료라면서. 우리가 4강까지 갔잖아. 매번 공짜였지. 그런데 4강에서 졌을 때도 그냥 무료로 줬어. 아, 져서 기분 나쁜데 돈까지 받을 수 없겠더라고. 아직도 그때 왔던 손님들 만나면 잔치같던 그 시절 얘기를 해. 참 재미있었어.”

 이때 말고도 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한번은 일주일 동안 해외에 나가있을 일이 있었어. 한국 오자마자 걱정돼서 가게로 달려왔지. 그런데 음식을 보니 재료가 다른 거야. 미나리와 깻잎 대신 콩나물이 들어가 있더라고. 버섯도 표고버섯 대신 싼 버섯이 들어 있고.”

무제한 무료로 제공되는 수제비는 배고프던 어린시절 배를 채워주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주방장이 원가를 줄이겠다고 재료를 바꾼 거였다. 매운탕 4인분이 2만5000원이던 때였는데 당시 미나리 값이 3배나 올라 가격을 맞춰보려던 나름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노발대발하며 욕을 퍼부었다.

 “손님한테 계약서를 쓴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이 가격에 팔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거잖아. 그런데 재료값 올랐다고 주인 마음대로 재료를 바꾸면 그 약속을 깨는 거야. 약속이 깨지면 손님은 안 와. 결국 내 살 깎아 먹기지.”

 그때 그 주방장은 중간에 떠났지만 같이 일하던 보조 주방장이 18년째 주방을 지키고 있다. 최 사장 원칙을 잘 지키면서 말이다.

 최 사장은 마지막으로 특이한 주문을 했다. 4명씩 오라는 거다. 그는 “식탁에 있는 불을 4인 기준 냄비에 맞는 화력으로 맞춰 놓았기 때문에 국물양과 수제비 양, 그리고 국물이 졸아드는 시간 등을 맞춰보면 4인분이 가장 맛있기 때문”고 했다.

번득 … 광장시장엔 횟집이 없으니까

“나 장사한 얘기를 해달라고? 그거 골치 아픈데. 그 얘기 다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다 못 써.”

 서울 광장시장 안 은성회집을 찾아가자마자 주인 윤맹임(73)씨가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윤씨는 50여 년 전 서울로 올라와 지금껏 줄곧 광장시장에서 장사했다. 하지만 사는 집은 이사만 11번 다녔다. 어려운 형편 탓이었다.

 “19살 때 구례로 시집 갔어. 친정에서 안 하던 농사일을 하려니까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한 2년 살다 1962년쯤 남편이랑 같이 서울로 왔어. 친언니가 생선가게를 하고 있었거든. 언니 옆에 가면 뭐라도 하게 되겠지, 싶었지. 서울 첫 집이 삼선교(삼선동) 산동네 방 한 칸짜리였어.”

단백질 풍부한 대구로 매운탕을 끓인다. 양은 푸짐하지만 3명이 오면 2인분이 아닌 꼭 3인분 주
문을 해야 한다. 늘 줄이 길어 식당 입구에 재료 담은 냄비를 미리 쌓아놓는다.

 언니처럼 번듯한 상점 차릴 돈이 없던 윤씨는 작은 나무궤짝에 생선 몇 마리 담아 돌아다니며 팔았다. 서대문 염천교 생선시장에서 언니가 생선 살 때 조금씩 같이 샀다. 그리곤 나무궤짝에 지푸라기로 끈을 만들어 들고 다니며 조기·갈치·민어를 팔았다. 그는 “광장시장 통로 폭이 8m라 다들 ‘8m도로’라고 불렀는데 그 길을 하루종일 왔다 갔다 하면서 팔았다”며 “갓난쟁이 큰딸 업고 팔다 둘째 딸 임신했을 땐 배 나온 몸으로 매일 장사했다”고 말했다. 하루 내내 팔아야 다음날 먹을 쌀 한 됫박과 밥 지을 연탄 한두 개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지만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냈다.

 “당장 쌀 사야 먹고 사는데 할 줄 아는 게 있나. 그저 생선만 잘 팔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때 소원이 자리 하나 얻어서 앉아서 장사하는 거였지. 그땐 그렇게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어.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

 윤씨는 그렇게 10년을 거리에서 장사했다. 그러다 드디어 ‘앉을 자리’가 생겼다. 한 건어물집에서 진열대 옆 작은 공간을 내준 거다. 겨우 대야 두 개 놓을만한 자리였지만 신이 났다. 오후만 되면 장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찼던 시절이라 장사도 잘됐다. 4~5년 정도 지나 약 23㎡(7평)짜리 가게도 얻었다. 비록 빚을 내긴 했지만 내 가게를 마련하고 나니 대통령도 안 부러웠단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매달 내는 가게 임대료와 가게 보증금 내러 빌린 빚이 부담이었다. 은행 문턱 높던 시절이라 일수로 돈을 빌렸는데 일수 빚 갚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잠시나마 폈던 형편은 다시 어려워졌고 충신동 평지에서 약수동 산동네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다.

 “수도도 없어서 다들 물지게로 물을 가져다 먹더라고. 물장사한테 물을 사 먹는 거지. 나는 오전 6시쯤 직접 물을 길어다 밥해서 애들 학교 보낸 다음 시장 와서 장사했어. 남편은 일하다 폐병이 와서 집에서 쉬어야 했거든.”

 그러다 70년대 중반 인생의 전환기가 왔다. 장사하다가 문득 ‘남대문 시장 지하엔 회 센터가 있어 손님이 시장에서 회를 직접 먹는데 왜 광장시장에는 회 파는 곳이 없을까’라는 의문이 든 거다. 마침 남편도 건강이 조금 좋아져 회 뜨는 걸 도울 수 있었다.

 “사람이 참 많았어. 미리 다 회를 떠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팔 정도였다니까. 식탁도 없이 그냥 간이의자에 앉아 쟁반 받치고 먹는데도 그렇게들 오더라고. 간판 하나 없어도 잘들 찾아왔지. 어차피 광장시장에서 회 파는 데는 우리집밖에 없었으니까.”

 장사가 잘돼 가게를 넓히고 장충동쪽에 집도 샀다. 그러다 84년 지금 자리로 옮겨 장사를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전에 장사하던 곳은 개인 소유 건물이고 지금 가게는 광장주식회사에서 임대 내 주는 곳이야. 회사 소유 건물에선 식당은 안 내준다는 원칙이 있다네. 다른 장사를 하라더라고.”

 평생 생선만 다뤄온 윤씨는 다른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정을 해도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식구들 목숨이 달려있다고 생각해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매일 아침만 먹으면 곧장 시장 안에 있던 광장주식회사 사무실로 출근했다.

 “어차피 장사 못하면 갈 데도 없잖아. 사무실을 매일 갔어. 당연히 앉으라는 소리도 없고. 한 두 달 뒤엔 아예 의자 들고 올라가 앉아있었지. 그렇게 한 6개월을 찾아갔어. 매일 찾아가니 점점 직급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고. 나중에 상무까지 만나서 사정사정했지.”

 이렇게 매일 찾아가느라 장사는 못했지만 윤씨는 매달 20일이면 임대료를 꼬박꼬박 냈다. 그 정성에 회사측에선 결국 허가를 했다.

 “내가 날짜도 안 잊어버려. 5월 20일 임대료 내고 빈 가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내일부터 식당 장사하라고.”

 그렇게 듣고 싶던 말, 눈물이 왈칵 쏟아져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5월 24일 식당을 열었다. 지금도 광장주식회사 소유 건물에서 음식점 하는 집은 은성회집밖에 없다.

① 어머니를 도와 20여년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 아들 김중현(50)씨. ② 국물맛 내려고 대구 머리는 그대로 넣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가시는 일일이 발라낸다.

 
비록 6개월을 쉬었지만 워낙 유명했던 집이라 문 열자 다시 손님 몰렸고, 그렇게 2~3년을 신나게 장사했다.

 “어느날부턴가 손님들이 회 먹고 나서는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하다는 거야. 그래서 매운탕을 한번 끓여봤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매운탕 손님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밀려드네. 테이블도 몇 개 없는데. 그 즈음해서 장사 도와주던 아들하고 상의 끝에 아예 매운탕만 팔고 회는 정리했어.”

 생선 중에서도 살 많고 맛 좋은 대구매운탕만 팔았다. 이 집에 가면 따로 주문할 필요 없이 인원수에 맞춰 대구탕이 나온다. 옛날부터 줄이 워낙 길어 가게 입구 쪽에 미리 2~4인분씩 냄비를 만들어 쌓아놓는다.

 “시장 음식이라고 우습게 보지마. 누구한테도 가장 좋은 재료 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보통 다른 집은 대구를 토막내 오면 그걸 씻어서 그냥 끓이거든. 우리 집은 뼈랑 비늘 쪽 지저분한 것들을 가위로 다 손질해서 잘라내. 손질에만 반나절이 걸리지만 난 그게 깨끗해서 좋더라고. 단 머리뼈는 국물을 우려내야 해서 그대로 둬. 김치도 직접 담그지.”

 손님 많고 일을 돕는 든든한 아들까지 있는데도 윤씨는 요즘 잠 못 들 정도로 고민이 있단다.

 “자리가 없어서 저녁에는 가게 앞에 테이블 깔고 장사했는데, 그걸 못하게 됐어. 다른 가게에서 항의를 한다는 거야. 오는 손님을 다 받지 못하니 원. 좀 넓은 가게자리 하나 얻는 게 꿈이야. 에휴. 지금까지 고생이네. 거봐, 머리 아프게 그런 얘긴 뭐 하러 하래.”

글=심영주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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