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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서태지·이승환·임재범의 공통점? 그에게 퇴짜 맞은 '전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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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위세가 대단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팝의 본고장인 영국·프랑스에서도 한국 아이돌 그룹 콘서트에 관객이 구름같이 몰린다.

이런 모습을 뿌듯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1980~90년대 대중음악계 대부로까지 불렸던 동아기획 김영(65) 대표다.

그는 “음악은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듣고 사유하는 콘텐트”라 말한다. 화려한 퍼포먼스로 현혹하는 요즘 한국 가요는 세대를 뛰어넘는 깊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얘기다. 80~90년대 김현식·들국화·빛과소금·시인과촌장·한영애·박학기·이소라 등 한국 대중음악사를 빛낸 명반을 빚어낸 김 대표와 함께 우리 가요사를 되돌아봤다.

수준 미달이었던 가요

김 대표 첫 직업은 통기타 강사였다. 대학에 다니던 70년대엔 장발 머리에 통기타 멘 모습이 젊음의 상징이었을 정도로 전국에 기타 강습 바람이 불었다. 여기엔 서울 명동의 음악다방 ‘쎄시봉’이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 모여 통기타 치며 음악 즐기던 명문대 학생들의 이지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을 동경해 통기타 배우기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경희대 작곡과에 다니던 김 대표는 당시 대학가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기타 명강사였다. “학생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서 서울 충정로, 정동, 합정동 로터리 3곳에 기타 학원을 차렸어요. 돈을 갈퀴로 긁어 모았던 시절입니다.” 1974년, 그러니까 스물 다섯 살 때부터 기사 딸린 차를 몰고 다닐 정도였다.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클래식보다 팝송, 팝보다는 가요에 더 관심이 갔다. 대중 가수로 활동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송창식·김세환·윤형주 등 통기타 가수들이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때라 김 대표도 가수의 꿈을 잠시 꿔보기도 했다. “그런데 한계가 보였어요. 가수가 노래 실력만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홍보를 위해 방송국에 로비하는 모습에 실망한 거죠. 그래서 가수의 꿈은 일단 접었죠.”

차선책으로 택한 게 레코드 가게다. 78년 아내 이름을 딴 ‘박지영 레코드’ 간판으로 음반을 팔기 시작했다. 광화문 등 번화가 3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다 특이한 상황을 감지했다. “팝송이나 클래식 음반은 사면서 가요 음반은 절대 안 사가는 거예요. 팝·클래식 음반이 85~90%고, 가요는 10~15%밖에 안돼요. 레코드 가게 하기 전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어요.”

김 대표는 이때부터 매일 손님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이 음반을 왜 사는지, 어떻게 알게 됐는지, 어떤 기준으로 음반을 고르는지, 딱 3개만 물었어요. 78년부터 82년까지 조사하니 확실한 답이 나오더라고요.” 손님이 알려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마디로 ‘한국 음악은 후지다’는 거예요. 소리는 얄팍하고 편곡은 촌스럽고 …. 결과적으로 가요 사운드를 팝이나 클래식처럼 풍성하고 세련되게 만들면 사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동아기획에서 나온 대표적인 LP 음반들.

김현식과의 첫 만남

팝과 클래식 이상의 감동을 주는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동아기획은 출발부터 좋은 소리 구현에 집중했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연주와 노래 실력을 갖춘 뮤지션 발굴부터, 편곡 기법이나 녹음 기술 등 해결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의외로 녹음 기술은 가장 쉽게 해결됐다. 당시 팝송은 16채널로 녹음하는 데 반해, 가요는 2채널 녹음이 전부였다. 채널이란 음악을 파트별로 녹음하는 걸 의미한다. 즉 16채널이면 한 음악을 16개 파트로 구분해 따로 녹음한다는 뜻이다. 웬만한 밴드 음악은 기타·베이스·드럼·건반과 보컬로 이뤄지는데, 여기에 코러스 등 각종 효과음을 입힌다 해도 16개 채널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따로 녹음한 음악을 후속 작업을 통해 최적화한 음으로 튜닝한 뒤 다시 믹싱하면 질 좋은 사운드가 탄생한다. 반면 우리 가요는 2채널, 즉 악단 연주와 가수 노래 둘만 따로 녹음했다. 그러니 악기별 소리가 제각각이고 전체 사운드가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로 녹음하는 요즘 가요는 보통 64채널로 녹음한다. 가수 이승환은 11집 앨범 수록곡 ‘화양연화’를 녹음할 때 무려 192채널로 제작했다. 드럼 소리 하나만 27채널로 나눠 녹음했다고 한다.

김 대표가 82년 동아기획을 출범할 때 때마침 미국에서 16채널과 8채널 녹음 기자재가 수입됐다. 미국 유학파 레코딩 엔지니어가 속속 한국에 돌아오면서부터다. “난 일류를 추구했어요. 이런 기자재, 기술자나 스튜디오까지 늘 최고급을 고집했어요. 그래야 제대로 된 게 나올 게 아닙니까.”

일류, 번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는 뜻이다.

이때 가장 먼저 손잡은 사람이 고(故) 김현식이다. “1집을 다른 레코드사(서라벌레코드)에서 이미 내고는 크라운호텔이나 하얏트호텔 밤무대에 간간히 서서 노래하고 그러던 때였지. 누구 소개로 내 사무실에 들어와서 내 앞에 딱 앉는데 ‘이거 물건이다’라는 감이 바로 왔어요.” 김현식과의 계약을 시작으로 조동진, 우순실 등 실력파 가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들국화와도 비슷한 시기에 만났다. “이태원에 신중현씨가 운영하던 ‘라이브’라는 클럽이 있었어요. 거기서 들국화 노래를 들었는데 이건 완전히 재야의 고수, 무림 지존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1996년 『월간 사회평론 길』에 실린 김영 대표의 인터뷰. 95년 이소라 1집이 100만 장 판매고를 올려 `미다스의 손`으로 주목 받던 시기다.

지금의 대표 연예기획사인 SM이나 YG, JYP는 오디션을 통해 소속 가수를 선발한다. 당대 최고로 불렸던 동아기획 김영 사단은 ‘감’ 하나로 끝이었다. “난 오디션 한 번도 안 봤어요. 그냥 딱 보면 알아요. 또 30분 대화하면 나랑 같이 갈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서고요. 계약하기 전에 노래를 들어본 가수는 들국화밖에 없어요.” 그가 가수를 영입할 때 던지는 질문도 정해져 있다. 지금까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추구하는 음악은 무엇인지, 성공하면 뭘 하고 싶은지, 곡과 가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하는지다. “물론 대답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태도나 눈빛, 목소리를 들으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다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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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그 전설의 시작

85년 9월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등 명곡이 수록된 들국화 1집이 나왔다. 김영 대표가 아낌없이 투자한 16채널 녹음 기자재를 십분 활용한 최초의 음반이다.

김 대표는 들국화와의 작업을 “천재와 호흡한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곡을 쓸 때 오선지를 앞에 두고 악상이 떠오르면 악보를 그려 넣잖아요. ‘행진’은 그렇지 않았어. 갑자기 (전)인권이가 내뱉는 거야.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 그럼 옆에서 듣던 (최)성원이가 베이스를 붕붕 치고 들어와. 거기에 (주)찬권이가 드럼을 두둥탁 치기 시작하는 거야. 거기가 녹음실이니까 이렇게 막 보컬과 악기가 치고 빠지고 하는 걸 다 녹음했다 다시 들어봤는데, 소름이 확 끼쳤어.” 즉흥적으로 내뱉은 노랫말에 즉석 연주가 쌓이고 쌓인 걸 가다듬어 ‘행진’을 완성하고 악보는 맨 마지막에 그렸다. “들국화는 그런 엄청난 내공이 쌓인 친구들이었어요.”

음악은 자신 있었지만 문제는 홍보였다. 당시 동아기획은 ‘얼굴 없는 가수’를 둔 곳으로 유명했다. TV 출연을 안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요 대세는 트로트였다고. 우리는 스스로 비주류로 노선을 정했어요. TV 출연을 거부하고 음악성으로 승부하면서 주류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고 싶었거든.”

TV 대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찾기 위해 회의를 거듭했다. “누군가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거야. 콘서트라 …. 그때까지 우리나라엔 콘서트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리사이틀이나 극장쇼가 전부였지.”

콘서트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영국 록그룹 퀸의 라이브 공연 실황 비디오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돌려봤다. “무대 장치부터 조명, 불러야 하는 레퍼토리, 관객과의 토크, 1부와 2부의 구성 같은 걸 샅샅이 메모하면서 봤어요. 서른 번 쯤 봤나. 그제서야 감이 좀 오더라고.”

대학로 샘터파랑새극장을 찾아가 한 달치 대관료부터 지불했다. 무대와 조명, 음향도 직접 체크했다. “엔지니어들도 처음이라 모르는 거야. 자꾸 리사이틀처럼 꾸미려고 해. 왜 현란한 색조명 달고 사회자가 진행하듯 하는 방식 있잖아요. 들국화랑 내가 그린 그림은 그게 아니었지. 실내를 어둡게 하고 핀조명으로 보컬과 세션 한명한명에게 포커싱하는 방식이었단 말이죠.”

리허설을 매일 했다. 열흘쯤 지나자 들국화 입에서 “자신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제서야 표를 팔았다. “처음에 30장 나갔던 거 같아. 원래 200명 들어오는 곳이었는데. 난 그것도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첫 공연이 끝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객석은 만원이 됐다. 음반은 더 불티났다. 85년 9월 10일 콘서트를 시작하고 3개월 만에 30만 장이 팔렸다. “진짜 날개 돋힌 듯 나갔다니까. 완전 터진 거야. 들국화가 터지니까 그 전에 만들어둔 김현식 2집, 우순실 1집이랑 조동진 1집도 줄줄이 팔려나가기 시작해요. ‘잘 만든 가요, 내가 해냈다’ 소리치면서 신나서 남산을 뛰어다녔다고.”

퇴짜 맞은 서태지·이승환·이상은

동아기획이 한국 대중가요 지평을 넓혔다는 건 업계에서 두루 인정한다. 사실 더 중요한 건 대중음악 수준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점이다. “80년대 초만 해도 음반 제작자 사이에 ‘구로공단 공순이가 좋아할 만한 쉬운 음악 만들어라’는 게 정설처럼 돌았어요. 그들을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당시 음반 제작자들 마인드가 그랬다는 거예요. 듣기 편하게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방송 몇 번 타게 해서 히트시키고 음반 판다는 생각이었지.”

김 대표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박지영레코드 시절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 고집스럽게 밀어부쳤고, 거짓말처럼 성공한 거다. “돈 벌었다는 것보다 잘못된 통념을 깼다는 희열이 더 컸어요. 소비자들에게 내가 새로운 선물을 줬다는 기쁨이기도 했고요.”

오직 음악으로 승부한다는 작가주의로 똘똘 뭉친 동아기획이 가장 사랑한 가수는 김현식이다. 들국화 1집의 기념비적인 성공 이후 김현식 2집 ‘사랑했어요’와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이 연달아 히트하며 동아기획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김 대표는 “아직까지 현식이처럼 노래 잘하는 사람은 본 적 없다”고 말할 만큼 그의 목소리를 아꼈다.

김현식·들국화·한영애 등 기라성 같은 선배를 흠모한 신인들은 데모 테이프를 들고 동아기획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김 대표는 “매일같이 300개 이상의 데모 테이프가 쌓였다”고 회고했다. “서태지나 (이)승환이가 나한테 퇴짜 맞았다고 얘기들을 하는데 솔직히 난 그 사람들 면담한 기억도 없어요. 그들을 놓친 아쉬움보다 손잡아주지 못한 미안함이 크죠.”

88년 강변가요제 대상을 받은 ‘담다디’의 이상은도 동아기획을 찾았다 빈손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자리잡은 뒤 “동아기획에서 날 안 받아줘서 음악을 더 열심히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임재범 역시 김 대표 거절로 다른 음반사에서 ‘사랑보다 깊은 상처’란 노래가 담긴 솔로 2집 앨범을 취입했다.

시대를 읽어야 한다

많은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동아기획 쇠퇴 원인을 서태지의 등장으로 꼽는다. 92년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가요계 판도가 랩과 댄스로 바뀌었는데, 동아기획이 이 시류를 읽지 못하고 언더그라운드만 고집한 게 쇠락을 불렀다는 것이다.

“서태지가 92년에 등장해서 세상을 삼켰지. 이후 댄스 세상이 열렸고.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여전히 듣는 음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잖아요. 동아기획이 낸 95년 이소라 1집이 100만 장이나 팔린 것만 봐도 듣는 음악을 원하는 고정팬은 여전하다는 걸 알 수 있지 않나요.”

일부에선 서태지의 등장이 아니라, 김현식의 죽음에서 동아기획이 쇠락하기 시작했다고도 얘기한다. 김 대표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현식이가 세상을 뜬 후 91년 8월까지 현식이 유작인 6집 앨범이 30만 장, 92년 연말까지 300만 장이 나갑니다. 물건 없어 못 팔 정도로 잘 나갔죠.”

김 대표 스스로 내린 동아기획 쇠퇴의 원인은 시대의 변화다. “대중 음악은 사회와 함께 갑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정치와 맞닿아 있다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시대 상황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예요.”

동아기획이 세상을 주름잡았던 84~86년은 군부 정권 시절이었다. 젊은이들은 저항하고 위로받고 싶어했다.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을 들으면 가슴 속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폭발하는 거야. 그게 공감이거든. 한국 정치상황이 80년대랑 똑같다면 나는 세세토록 히트곡을 낼 수 있지.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이제 김현식과 들국화 시대는 간 거야. 그게 팩트야.”

김 대표는 동아기획 출범 당시 초심을 잃지 않았다. 좋은 음악, 좋은 소리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게 음반 제작자 역할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댄스음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댄스 음악 하나만 살아남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 장르가 공존하며 다양한 소리를 들려줘야 제2의 대중음악 르네상스가 열리지 않겠어요.”

대중음악의 부흥을 위해 가수들에게 "실력을 키우라”는 쓴소리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은 10년 이상 음악 내공을 쌓은 재야의 고수였던데 반해, 지금의 인디 가수들은 자기 멋에만 취해 있고 대중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지금도 대중음악 다양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 실력 있는 인디가수를 발굴해 음반을 제작하거나 팝페라 등 크로스오버 영역까지 관심을 넓혔다. 동아기획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도 준비 중이다.

“숨겨진 진주 같던 우리 시대 가수, 그들이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감했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거지. 현식이나 들국화나 영혼을 담아 노래했기 때문에 20년, 30년이 흘러도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잖아요. 듣는 음악의 힘, 그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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