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환의 배틀배틀] 61분 걸린 승부…게임은 체력전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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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프로게이머는 달리기로 하루를 연다. "키보드만 두드리는 게이머에게 체력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체력의 뒷받침 없이는 승자가 될 수 없다.

2002년, WCG(World Cyber Games) 본선 조별 풀리그에 출전했다. 그때 나는 체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동안 정말 많은 경기를 했지만 그런 장기전은 처음이었다. 딱 한 게임에 무려 1시간1분30초가 걸렸다. 상대는 불가리아의 알렉산드로프(프로토스). 나는 지면 탈락, 이긴다 해도 재경기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내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 외국 선수들은 게릴라식 플레이에 약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프는 치고 빠지는 내 전법을 척척 막아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멀티(확장)기지를 하나씩 늘려 갔다. 상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를 더욱 탄탄하게 꾸렸다. "아, 이렇게까지 흔들었는데 꼼짝도 않다니." 이대로 계속 몰리면 내가 패할 게 불 보듯 했다. "늦으면 안 된다.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상대는 대규모 물량 공세에 나섰다. 나는 그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30분쯤 지나자 손이 땀으로 젖었다. 손가락이 아프고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스타크래프트에선 1, 2초의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한눈을 파는 순간 무너지고 만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섬 쪽에 확장기지를 지었다.

상대는 확장기지를 지을 데가 한 군데밖에 없었다. 11시 진영. 장기전이라 다른 자원은 이미 고갈된 상태였다. 중앙에선 그의 병력과 내 병력이 대치 중이었다. 11시 방향의 자원 채취를 위한 둘 사이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아직 내가 불리하지만 11시 진영만 내주지 않으면 승산이 있어. 그래, 버티자."

상대는 총공세를 가했다. 1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상대는 점점 조급해졌다. 드디어 알렉산드로프의 마지막 러시가 시작됐다. 땀으로 등이 흠뻑 젖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마지막 공격이 실패하는 순간, 패배를 시인하는 'GG'가 나왔다. 1시간이 넘는 장기전, 승리의 쾌감도 곱절이었다. 벼랑 끝에서 건져 올린 승리였다. 이후 경기는 술술 풀렸고, WCG 우승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장기전은 그야말로 체력전이었다.

<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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