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성 있으나 신빙성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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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른바 박상은 양 살해 사건의 피고인 정재파 군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 졌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검찰 진술에 임의성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 같은 판결을 내렸다.
윤경화 노파 살해 사건의 피고인 고숙종 여인에 대한 1심 및 2심 판결이 무죄로 낙착된 뒤라 정 군의 무죄 판결이 던진 파문은 더욱 크다.
이 판결은 한마디로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유죄로 인정치 못한다는 사법상의 대 원칙을 다시금 확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검찰의 입장은 재판부의 엄격한 증거주의 앞에 또 한 번 좌절을 겪은 것으로 풀이된다. 모든 범죄 수사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 개선해야 할 계기로서의 뜻을 지닌다 하겠다.
박 양 피살 사건은 해외연수를 다녀온 대학생간에 일어났다는 사건의 성격 말고도 수사 단계에서 검찰이 경찰 수사를 완전히 뒤엎은 우여곡절 때문에 한층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검찰은 그때 결론부터 설정해 놓고 수사 방향을 거기에 맞추려는 경찰의 주먹구구식 수사에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제 검찰의 수사 결과마저 재판부에 의해 사실상 같은 이유로 배척된 셈이다.
검찰로선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 한가지 이유는 검찰 수사에 대한 일반의 신뢰가 이로써 크게 손상을 입지 않았겠느냐는 우려 때문이다.
이번 판결이 특히 주목을 끄는 까닭은 자백이 갖는 증거로서의 한계를 명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 동안 검찰에서의 자백은 「임의성」이 있다고 인정되면 법원은 이를 증거로서 채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자백의 임의성은 인정하면서도 자백 내용이 객관적 정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판시한 것이다.
뿐더러 재판부는 검찰이 과학수사의 성과로 자신 있게 제시했던 정황 증거들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이 정 군의 자동차 시트커버에 묻은 혈흔과 녹화기, 녹음기에서 거짓말 탐지기에 이르는 과학기재를 동원, 임의성 있는 자백을 얻은 데 대해 재판부는 이를 충분치 않고 신빙성도 없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우리는 여기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reo)라고 한 법언을 음미하면서 재판부가 요구한 「엄격한 증거」의 뜻을 되새기게 된다.
비록 최신의 과학기재를 동원해서 얻은 증거라 할지라도 그것이 객관적 타당성을 갖지 않은 것이라면 증거로서 소용이 없다는 점을 이 판결은 분명히 했다.
다만 재판부가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충분치 않고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할 때, 판사는 꽤 그것이 신빙성이 없는지를 납득시킬 만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이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아쉽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선진국형의 과학수사를 지향하고 촉진시킨 자극은 되었다.
확고한 증거부터 잡고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백부터 받고 거기에 정황을 맞추려는 지금까지의 주먹구구식 수사 방식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종래의 수사 방식과 과학수사 사이의 과도기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형의 과학수사 체계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인원, 기재, 장비 등 막대한 재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련한 수사요원을 육성하고 확보하는 일은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의 강력사건은 갈수록 악랄하고 잔인해지는 성향을 띠고 있지 않은가.
과학수사 체계가 완벽하게 될 때까지의 과도기를 어떻게 넘길까.
이 문제는 검찰 등 수사기관만의 과제일 수가 없다. 그것은 판사, 변호사 등 법조인은 물론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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