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개헌은 정권놀음 대상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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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는 주5일 근무제 시대를 맞아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뺄 방침이다. 공휴일에서 빠진다고 해서 제헌절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정부가 4대 국경일 중에서 왜 제헌절을 그토록 쉽게 공휴일에서 제외하려 하는가에 있다.

그것은 헌법과 국가 정통성에 관한 인식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즉 현 정부 고위층의 주류를 이루는 인사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거나, 헌법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법적으로 보면 제헌절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헌법이 제정.공포됨으로써 비로소 대한민국이 성립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함으로써 그 정체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이상과 목표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상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조직과 그 운영 방법의 기본원칙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국정운영은 그러한 헌법의 정신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므로 국정 운영자들의 권한과 책임(지위)은 바로 우리 헌법이 부여한 지위다. 그 이외에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지위를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구체적인 국정운영의 방법과 절차도 헌법의 규정 내용이나 정신에 따라 해야 하며,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57년간 대한민국 헌법 체제에서 오늘의 국력 신장과 번영을 이룩했다. 그 짧은 기간에 농경 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를 거쳐 탈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려는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민족을 가난에서 해방시켰으며,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를 이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 경제발전과 민주화 두 가지를 모두 성공시킨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뿐이다. 우리 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만들어낸 자유민주주의 헌법과 그 헌법하에서 이루어낸 성공적인 국가발전을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의 헌정사에는 어두운 면과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9차례의 개헌사 중 두 차례만 빼고는 모두 집권세력의 권력 연장 또는 탈취를 위한 오욕의 헌정사였다. 그래서 법률가들은 그것을 헌법 개정이 아니라 개악이라고 하며, 헌법학자에 따라서는 헌법 파괴라고까지 혹평한다. 헌정사의 그러한 후퇴는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발전을 크게 저해한 요인이었다.

무릇 개헌을 하려면 개헌의 당위성과 방향성이 명확해야 한다. 1987년 개정한 제6공 헌법은 대통령 직선 및 단임제 수용, 헌법재판소의 신설 등으로 국민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킨,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민주 헌법이다. 따라서 개정해야 할 중대한 사유가 발생했거나, 명백한 결함이 드러나지 않는 한 개헌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국정운영의 미숙이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제도 탓으로 돌리는 위정자들의 그릇된 버릇이 아직도 개선되지 않고 툭하면 헌법 개정을 들먹인다. 운영의 묘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헌법 개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국력의 낭비요, 법치주의의 이상에도 맞지 않는다. 국민의 권익을 증진시키고 강화하는 개헌이 아니고 정부 조직과 기구를 이리저리 바꾸는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이 될 정도로 성장.발전한 우리가 후진국처럼 잦은 헌법 개정의 정치놀음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동안 급작스러운 성장과 성공의 뒤안길에서 저지른 어두운 면들은 헌법의 정신과 내용에 따라 착실히 개선하고 개혁해 나가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제발 헌법 개정 문제를 정치인들의 정권놀음의 대상으로 삼지 말기를 바라며, 우리 국민도 이러한 행태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아야 될 것이다.

김인섭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