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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함종 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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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나라의 어씨는 본이 셋이다. 함종·충주·경흥.
전국에 1만5천여 가구 남짓한 어씨 중에 80%는 함종 어씨.
희성 치고 본 셋이 많은 셈인데 그 셋이 또 뿌리가 완전히 다른 남남인 것이 특징 있다.
충주 어씨는 원래는 어씨가 아니라 지씨. 고려 태조의 공신 지중익이 겨드랑이에 고기처럼 비늘이 있는 것을 보고 태조가 물고기(어)로 성을 바꾸게 해 고양 충주를 본으로 가문을 창립했다.
경흥 어씨는 불과 3백여 년 전 조선 숙종 때 두만강 가운데 수달피 옷을 입은 젖먹이가 배에 실려 떠내려오는 것을 경흥 부 민들이 주워 길렀는데 숙종이 강 중에서 나왔다 하여 어씨 성을 내렸다고 전한다. 여진(만주)계의 후예로 추측된다.
어씨의 대종인 함종 어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인.

<처음엔 강릉 살아>
처음엔 강릉 살아
시조 화인은 중국 남송 사람으로 풍익에서 살다 난을 피해 고려로 건너왔다고 한다. 고려초엽이라고만 전할 뿐 정확한 연대나 그 밖의 자세한 것은 모른다.
처음 강원도 강릉에 자리잡았으나 후에 평안도 함종(현 평남 강서군 함종면)으로 옮겨 대대로 살면서 본관을 함 종으로 쓰게 됐다.
그의 6대손 되는 도량이 경남진주로 터를 옮겼고 거기서 다시 서울과 전국 각지로 흩어져 함종 어씨는 수는 많지 않은 대로 전국에 분포한다.
화인으로부터 35세까지 세계가 내려오는 동안 11개 파가 갈렸으나 그 중에도 가장 융성하기는 문정공·양숙공의 2개 파. 세조·예종 때 병조판서·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어세겸과 호조판서를 역임한 양숙공 어세 공 형제의 후손들이 수도 많고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수에 비해 역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 함종 어씨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어씨의 인물이라면 한말 개화기주역 가운데 한사람인 어윤중을 꼽게 된다.
경기도 용인태생. 양대 파 가운데 양숙공 어세 공의 후예다. 고종 6년 과거에 급제 홍문관 교리, 수찬, 양산군수 등을 역임하며 촉망받는 소장 엘리트관리로 그 식견과 능력이 일찍 드러났다.
국량과 안목·수완을 겸비해「기재」의 호칭이 있었던 그는 무리 중에 자연스럽게 두드러 지는 그런 인물이었던 듯 하다.
많은 책을 읽고 한번 읽은 책은 결코 잊지 않는 박현강기의 재능이 놀 라와 캄캄한 밤중에 집에 간직한 수천 권장서의 위치를 틀림없이 찾아낼 정도였다고 후손들은 일화를 전한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떴고 나름의 진보적 경세이념을 체계화했다.
김옥균·박영효 등 이른바 급진개화파에 대해 김윤식·김홍집 등과 함께「온건개화사상가」로 꼽힌다. 그의 개화사상은 1881년 고종의 특명으로 파견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개화 일본의 신식 문물을 보고 난 뒤 더욱 굳어졌다.
대원군집정과 두 차례의 양요, 개국, 대원군의 실각,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란, 갑오경장, 아관파천까지 격랑의 한 시대를 살며 온건·점진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코자 진력했으나 끝내 대 재를 제대로 써 보지 못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피신 길에 고향인 경기도 용인에서 폭도들에 피살당한 불행한 최후였다.
갑오경장 후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에 임명된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치고 그의 경제 논을 우리나라 근대경제학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가운데 특기할 것은「간도영유권」의 최초 확인자라는 것이다.

<간도 영유권 확인>
1880년(고종 20년)북쪽변경문제의 파악을 위해 고종은 그를 서북 경 약사로 파견했다. 평안도를 거쳐 함경도에 머무르며 백두산 근방의 지리를 조사하고 청과의 불분명한 국경확정에 나셨다. 한·청 국경의 명문화된 증거는 숙종38년(1712년)청나라와의 사이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 그는 비문의「토문」강이 두만강과는 다른 송화강의 지류인 것을 밝혀 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미 많이 건너가 살고 있던 간도가 조선영토임을 처음으로 명백히 했다. 청나라 측 돈화현에 통지, 함께 정계비일대의 지리를 탐사해 경계를 확정하자고 제의하는 한편 조정에도『간도는 명백한 조선 땅』이라고 보고했다.
뒷날 일제에 의해 간도영유권은 멋대로 청에 넘겨졌으나 그의 앞을 내다본 업적은 장차 빛을 볼 것이 틀림없다. 충북 보은에는 그가 고향 용인에서 이사해 살던 집이 전하며 증손 넷이 서울과 대구에 살고 있다.
어윤중의「경세대재」와 함께 어씨들은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을 지키다 전사,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충절」을 가문의 명예로 삼는다.
187l년 신미양요는 그 5년 전에 있었던 병인양요와 함께 5백년 쇄국의 만감을 깨우는 서양의 포성이었다.
19세에 무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광양현감·장단부사·회령부사 등을 역임하고 부 총관 겸 금위영 중군 직에 있던 어 장군은 미 아시아함대의 침입급보에 강화진 무중군으로 임명돼 양이의 침범으로부터 서울의 입구를 지키는 중책을 맡게 됐다.
1871년 4월29일「로저스」제독의 지휘하에 기함 콜로라도를 비롯, 호위함3척,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천2백30명으로 구성된 미 아시아함대는 강화해협에 진입, 다음날 4백50명의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초지진·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하고 강화수로의 마지막 보루인 광성진에 육박했다. 어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비군과「블레익」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간에 육탄의 혈전이 벌어졌다.
남북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던「블레익」중령은 훗날『그렇게도 협소한 장소에, 그렇게도 짧은 시간 내에, 그처럼 많은 불꽃·납덩이·쇠붙이가 오가고 화약연기 속에 휩쓸린 전투는 본 일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양의 신식병기 앞에 조선의 중세병기는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지만「양이」의 침범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심만은 장졸이 하나같아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다 쓰러졌다.

<강화도에서 전사>
조선 군 전사 53, 부상 24. 미군전사 3, 부상 16. 어 장군은 이 전투에서 동생 재순, 종 임지팽과 함께 전사했다. 1868년 대동강을 거술 러 오르다 격침 당한 셔먼호사건의 문책으로 「포함외교」에 나섰던 미국은 이 광성진 점령으로 일단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판단, 철수했다.「조선무사의 투혼」을 보인 어장군 부대의 광성진 육탄전이 양이를 물리친 결과가 됐지만 대원군은 이에 자신을 얻어 척화비를 전국에 만들어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굳게 하는 계기로 삼았다.
해방 후 광성진에는 어 장군 이하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고 경기도 이천군 동면 산성리 장군의 생가는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어씨 가의 인물 중 이채를 띠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이자 여성독립운동가인 어윤희.
12살에 어머니가 죽고 시집간지 사흘만에 남편이 전사, 16살에 과부가 되고 18살에 아버지마저 여의어 10대 청상고아 과부가 된 박복한 여인은 스스로의 의지로 불행을 극복하고 자신이 목말랐던 사람을 자신 같은 불행한 이웃에 넘치게 나누어주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다.
아버지를 여윈 후 고향 충주를 떠나 개성으로 갔다. 기독교에 입신하고 신학문을 배웠다.3·1운동 때는 개성에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녀가 고아사업에 착안한 것은 바로 자신의 뼈저린 체험 때문. 일제 말 개성에 세운 유린보육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

<미신타파에 앞장>
해방 후엔 서울마포로 옮겨 현재는 그가 길러 낸 후배들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다. 61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쉬는 것을 못 보았다』는 봉사의 일생이었다.
『말은 미덥게, 행동은 독실하게(언충신 행독경)』가 그의 좌우명.
한말 학부편집국장을 지낸 어윤적, 고종의 시총무관으로 민영환의 순국자결현장을 목도. 증언했던 어담도 함종 어씨.
조선조의 함종 어씨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학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훗날 이조판서를 지낸 문효공 어효섬이 중조격.
미신타파에도 앞장서 가는 곳마다 서낭당·산신각 등을 없애는 것은 물론,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까지 배척했다.
그의 아버지는 역시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어섭갑. 효첨의 두 아들이 바로 문정공 어세겸,양숙공 어세공이다. 율곡 이이를 가르친 어숙권이 일세의 명유로 꼽혔고 임진왜란 때 광양현감으로 이 충무공을 도와 빛나는 무공을 세웠던 어영담이 어씨의 무맥을 이었다.
함종 어씨는 단촐한 집안답게 종친회의 활동도 활발해 2억 여 원의 기금을 모아 장학·수보사업 등을 펴고 있다. <글=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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