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의 문학 터치] 숨 가쁘게, 몸서리치게 하던…'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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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개, 김훈 지음

기자 김훈이 있었다. 한국일보 문학담당이었던 1980년대 김훈은 국내 언론이 그어놓은 금을 넘어간 최초의 기자였다. 6하 원칙이 언론계의 만유인력과 같은 법칙이었던 시절, 그는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고 시작하는 글을 기사라고 썼다.

작가 김훈이 있다. 10년 사이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하더니 어느날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돼 있었다. 두달쯤 전 프랑스의 세계적 출판사 갈리마르의 세계문학선집에 한국 문학 최초로 '칼의 노래'가 들어갔을 때 문단은 그를 대가로 예우하기 이르렀다. 그가 중편을 새로 내놨다. 이름이 '개', 부제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 따라붙었다.

기자 김훈을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힘은 한가지라고 단언해도 좋다. 스타일. 문체라고 부르면 어딘지 모자란, 글자마다 풍기는 독특한 냄새가 그의 문장엔 있었다. 그 냄새는 각성제와 같은 효력이 있어 독자를 허리 곧추세우게 했다. '이야기가 있어 글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글의 긴장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평론가 서영채의 해석은 옳다. 문장은 극히 짧아 호흡 또한 가빠지고, 냉정하고 잔혹한 묘사에선 거부감 일어난다. 집요하게 파고든 주제의식 이면에 도사린 냉소의 기운을 알아챘을 땐 온몸에 전율이 흘렀음을 예서 고백한다.

그러나 이번엔 냄새를 맡지 못했다. '~했어'로 끝나는 대화체와 '~했다'고 마치는 서술체를 뒤섞은 까닭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긴박하지 않아 낯설었다. 예전엔 한 자 한 자 눌러쓴 기(氣)가 비쳤는데(실제로 그는 연필로 쓴다. 가방에 늘 연필과 칼을 넣고 다닌다), '은.는.이.가'의 미세한 차이를 놓고 갈등한 흔적 역력했는데, 이번엔 좀체 찾기 어려웠다.

부러 연필심 끝의 힘을 줄인 것인지, 하여 뭉뚝한 연필심을 앞으로도 고집할 것인지, 이번에만 청소년 독자를 위한 성장소설을 의도한 것인지 불친절한 작가는 밝히지 않았다. 우화 한편 읽은 기분이지만 김훈을 읽은 느낌은 덜 하다. 쉬이 읽히는 것과 재미나게 읽는 일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하나. 앞서 굳이 냄새라고 적은 건 일종의 오마주(hommage.경의)다. 소설에서 진돗개 '보리'는 오로지 냄새로 세상을 인지한다. 여기서 눈밝은 독자는 알아챘으리라. 보리는 들어본 이름이다. 뇌종양 걸린 아내가 발작 상태에서 "여보… 개밥 줘야지"라며 중얼거리게 한 주인공. 아내가 죽고 동물병원에서 명을 끊는 주사를 맞은 진돗개가 보리였다. '굳은 살 박인 발바닥'을 가진 개의 모티브는 지난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화장'에서 진작에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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