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어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무래도 난 천당보다는 지옥엘 가는 게 좋을 것 같애. 천당에서야 천사·승려·걸식 자…어디 그런 이들 밖에는 더 만나겠나. 군주다, 왕이다, 귀족이다 하는 양반들과 가까이 지내려면 역시 지옥으로 가는 게 틀림없지…』(「닉클로·마키아벨리」1530년 졸). 그처럼「대관절 권력이란 뭐냐」라는데 오래 신경을 곤두세워 놓고 있고 보면 지옥이라는 게 그렇게 보이게 되기도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래도 자기 행선지가 위이기보다는 밑일 것 같은 기분이고, 그렇다면 이왕 갈 곳, 나쁜 면만 볼게 아니라고 짐짓 이렇게 말한 건지.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건 죽음이라는 게 보자 하니 반드시 누구에게나 여유를 주지 않고 찾아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사람들-.
『가만 있자. 내 사인이라는 걸 좀 알고 나 죽자. 뭐였더라. 옳지, 눈치 빠른 여자, 빠르지 못한 경마, 진짜 위스키, 가짜 화투장. 이런 거이었지?』(미국시인「케네드·랙스로스」 1903년 졸). 1802년에 타계한 사가「조지·포다이스」는 독경을 하던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그 정도 해 두고 가 자거라. 나도 이젠 좀 죽어야겠다.』
생사 역시 승부라면 승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죽음, 이번엔 자네가 이겼네.』(법왕「비오」9세. 1878년 졸). 그래선 지 마지막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1794년의 파리. 단두대에서 형리가 마지막으로 럼주 한잔을 권하자 귀족사형수는 이를 사양하면서 이랬다. 『아냐, 안 마시는 게 좋아. 난 술만 먹으면 곧잘 방향감각을 잃거든 .위로 가야 할걸 아래로 간다든지 했다 간 아닌게 아니라 보통 일은 아니다.
마지막이 가까워 오면 사람은 눈을 신 쪽으로 돌리게 된다. 1742년 세상을 떠난「앤드루·브래드퍼드」(필라델피아 최초의 신문발행인)는 끝으로 이렇게 덧붙었다.『그리고, 그 동안 적지 않았던 오 식들도 아울러 용서 하옵시고…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국의 신문사장이면 충분히 이런 기도를 드릴만도 하잔 은 가 여겨진다. 신에 비는 자세도 여러 가지다. 『주님은 저를 용서하시리라 믿습니다. 용서한다는 게 주님의 직업이 아니십니까』(시인 「하인리히·하이네」1856년 졸).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는 몰라도 병실에 굴러다니던『임종어록』이란 책에서 나온 얘기들이다. 이런 책이라도 뒤적거리고 있는걸 보면 나도 꽤 많이 몸이 나아졌나 보다. 내 발톱을 깎아 주던 간호원이 힐끗 책 겉장을 보더니 그 어록에 내 이름도 들어 있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니까 간호원이 한번 벙글하더니 그러면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으란다.

<박중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