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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했던 첫 결혼…"돈 벌겠다"입 버릇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장씨는 첫 남편 김수철씨(53)와의 사이에 딸(16·고교 재수 중)과 아들(12·국교생)을 한명씩 두었는데 김씨와 이혼한 뒤에도 3, 4개월 간격으로 주로 김씨가 회사에 나가 없는 사이에 자녀들을 만났다.
장씨는 김씨와 이혼한 후에도 자녀들에게는 단지「별거」중이라고 말해 이번 사건으로 두 번씩이나 이혼간 사실이 지상에 보도되기 전까지는「소박하고 검소한 어머니」로만 인식되어 왔다는 것.
또 장씨는 이철희씨와 결혼하기 전에도 생활이 난잡해 친척으로부터 집안망신을 한다며 『가정으로 돌아가든가 이씨와 결혼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심한 질책을 받고 결혼을 서둘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첫 남편 김씨와의 접촉은 최근까지도 계속됐고 증권과 사채시장에서 협조관계(?)여서 장씨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아 김씨는 이 사건이 터지기 2, 3주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장씨가『저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못 가서 튼 일이 날 것 같다』고 우려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장씨가 돈에 애착을 가지게된 것은 결혼 후 첫 남편 김씨가 외국에 2년 동안 나가있는 사이 국내에 혼자 남아 경제적인 고통을 많이 당했을 때부터. 이때 주위사람들에게『무슨 수를 써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고, 『돈을 벌면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얘기했다는 것.
김씨는 공영토건 사장 변강우씨와 서울대 최고 경영자 과정을 함께 수료했으며, 최근까지 「대아 금속」사장으로 재직해왔다.
김씨는 지난 9일 수사기관에 연행돼 하루만에 다녀온 후 다음날 『기분이 나쁘다. 여행이나 다녀와야겠다』며 백에 옷을 넣고 집을 나가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는 것.
○…장씨가 두번째 남편인 K제강 홍모씨(67)와 결혼해서는「돈」을 쫓았다는 것이 주위의 중론.
홍씨의 한 측근에 따르면 장씨가 나이 차가 많아 도저히 결혼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고도 홍씨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다는 것.
처음 홍씨도 장씨를 무척 아꼈으나 장씨가 몇 차례에 걸쳐 거액의 돈을 빼돌려 홍씨의 눈밖에 들기 시작했다는 후문.
특히 재산관리 주도권을 둘러싸고 결혼직후부터 홍씨의 맏며느리와 거의 매일 다투었다 는 것.
홍씨의 며느리는 장씨보다 나이가 위였으나 맏며느리에게 맡겼던 재산관리를 장씨가 들어오자 장씨에게 맡겨 주도권을 놓고 맏며느리와 싸움을 벌이게 됐다는 것.
또 홍씨 가족들은 장씨가 학력을 속이고 미국까지 유학을 갔다왔기 대문에 영어도 잘한다고 들어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으나 나중에 흥신소를 통해 알아본 결과 거짓말임이 드러나 장씨를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K제강 홍모씨와 이혼한 뒤 파티를 자주 열었는데 파티 장소는 주로 장씨의 집이거나 호텔을, 빌어 이용했다.
파티규모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호화판이었고 장씨는 노출이 심한 양장 파티복을 주로 입었다.
파티 참석자 중에는 거물급 구 정치인 J씨, K씨 등이 단골이었다.
○…장씨가 50억원 상당의 미술품을 고가로 수집했다고 하나 실제 가치는 별게 아니라는 것이 화랑가와 골동품상가의 얘기고 S화랑 주인 유모씨는『장씨가 미술품에 대한 그 나름의 견식이 없어 비싼 것만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식이었고 그 때문에 몇몇 브로커들에게 가짜를 속아 사거나 바가지를 쓴 적도 많았다』고 했다.
유씨에 따르면 처음 장씨를 만난 것이 칠보사(주지 강석주·75)에 용두관음보살상을 헌납할 때였는데 눈에 띄는 한복 차림이어서 주위사람에게 물었더니 골동품을 해서 돈을 번 여자라고 들었다는 것.
그러나 골동품을 취급한다면 그 바닥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온 자신이 장씨를 모를 리가 없어 의혹을 갖게돼 경계했다며 『장씨가 골동품을 이용, 지위와 재력이 있는 인사들의 접근에 이용했다』고 전했다.
78년7월 장씨가 문화재 보호법 위반혐의로 치안본부에 구속됐을 때 증거물로 압수된 신안유물 1백여 점 가운데 진짜는 4점뿐이었다는 것.
당시 장씨의 남편인 홍모씨 집을 급습, 유물을 압수했던 치안본부 특수대원들은 홍씨 집 다락에서 얼핏보아 특급 문화재가 분명한 자기류 등 1백여 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전문가들을 통해 감정한 결과 대부분 가짜임이 드러나자 장씨는 자신이 조사를 받고있는 사실도 잊은채『속았다』며 발을 구르더라는 것.
○…장씨가 불교로 개종한 것은 78년 초 이규광씨의 부인인 언니의 소개로 서울 평창동 정토사를 찾고부터, 이 당시 정토사의 주지 스님은·설산 스님으로 신도들과 함께 절의 건립에 매진 중이었다.
장씨는 당시 시주로 1천만원을 선뜻 기증하는 등 절의 건립을 도왔다.
여기서부터 다른 신도들과는 스케일이 달라 일반 신도들은 그녀가 상당한 권력층의 후광을 입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
○…장씨는 한달에 한번 가량 절에 들러 고고한(?) 모습을 나타냈다고.
항상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목걸이 등 귀금속은 일체 몸에 지니지 않았고 매니큐어 등의 화장도 않았다는 것.
또 일반 신도들과는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주지 스님만을 상대했다.
방생 등 불사를 할때는 비디오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담기를 즐겼고 불사 때 모이는 신도들에게 자신의 불명인「장 보각행」이 적힌 수건·비누들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장씨가 지난해 봄 정토사를 인수해 각정단원으로 개명한 것은 자신의 불명「보각행」에서가운데 자를 넣은 것.
○…장씨에 대한 항간의 나쁜 소문과는 달리 측근들에게는 소박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자장하고 친절하게 대한 일면도 있다고.
남양주군의 별장 관리인 이모씨(40)는 『장씨가 찾을 때는 2, 3일에 한번씩 남편 이씨과 함께 한복차림으로 별장을 다녀가곤 했는데 동네사람들의 딱한 소식을 들으면 익명으로 도와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머리손질을 L호텔 부근 B, S, P미용실 등 최고급 미용실만. 번갈아 가며 이용했다.
B 미용실 미용사 김모양(19)에 따르면 장씨는 2년전부터 하달에 두세번 들러 샴푸와 드라이의 간단한 머리손질을 하고 가는 정도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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