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지주사 규제까지 풀어 … 계열사 간 공동투자 허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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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부는데, 언제까지일지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삼성전기 김경식(가명) 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소문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삼성전기는 제조업 핵심 재료인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만드는 정통 제조업체다. 한때는 세계 1위인 일본 무라타제작소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엔화 약세로 최근 수출 경쟁은 더욱 어려워졌다.

  국내 제조업 전반으로 경쟁력 약화가 전염병처럼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원샷법’으로 불리는 산업경쟁력강화법을 서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중국의 급부상, 미·일 등 선진국의 제조업 부활 등 글로벌 산업 판도 변화로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정보기술(IT)과 자동차는 물론 조선·중공업·석유화학 등 무기력증에 빠진 주력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큰 틀에서 정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법은 투자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기업이 신청하고, 정부가 승인만 하면 ‘원샷’으로 공정거래법, 상법까지 모두 해결하는 일종의 패스트 트랙이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빅딜(대기업 간 사업교환)형’ 사업재편이 정부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면 원샷법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사업구조 개편, 신사업 개척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도록 걸림돌을 제거해주는 데 주안점을 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부실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데 수반되는 세금 부담을 없애고, 계열사 공동투자와 공동 연구개발(R&D)이 가능하도록 ‘성역’처럼 여겨진 지주회사 관련 규제까지 완화하겠다는 게 원샷법의 핵심이다. 그간 경영 투명성과 재무적 안정에 무게 중심을 둔 기업정책을 투자와 경쟁력 찾아주기로 방향을 틀었다는 확실한 신호탄인 셈이다.

 이에 따라 사업조정이나 신사업 발굴에 나선 기업들이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벤치마킹에 나선 일본의 산업활력법은 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3년 한시 특별법 을 제정했다. 각종 규제를 일거에 없애 투자와 일자리를 확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경제산업성 주도로 만들어진 이 법은 큰 효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법안 시행 이후 일자리가 크게 늘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산업활력법 적용(2003~2007년)을 받은 기업 103곳에서 4만9281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다. 반면 이 기간 해고자 수는 810명에 그쳤다.

 기업의 합종연횡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신일본제철은 2011년 산업활력법의 지원을 받아 일본 3위 철강회사인 스미토모금속공업과 합쳐 세계 2위의 신일철주금을 탄생시켰다. 닛산 역시 이 법을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활용해 52개 계열사의 사업을 정리했 다. 대기업만 효과를 본 게 아니다. 법 시행 후 2010년까지 이뤄진 총 542건의 사업 재편 가운데 48%가 중소·중견기업이었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연구실장은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샷법처럼 신사업 투자와 사업재편에 나설 수 있는 맞춤형 기업 정책을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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