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공산주의자들의 선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은 그 수법이 악랄하고 내용이 고약하기 짝이 없다. 이집트에서 내가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리를 잘 알고있다. 그들은 이집트의 정치정세와 사회질서가 불안하게 보이도록 온갖 선동을 다했다. 자그마한 일을 커다랗게 과장하는가 하면 전혀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인양 그럴듯하게 꾸며내 선량한 국민을 현혹시키기 일쑤였다.
내가 가장 최근에 경험한 것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다. 81년6월 카이로 근교의 재개발지역 엘 자와 엘 하므라에서 회교도와 콥트파 기독교도간에 사소한 싸움이 있었다.(주=콥트교란 서기42년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사람이 창설한 기독교의 한 분파로 전세계에 약2천2백만, 이집트에만 6백만의 신도가 있다. 이슬람교와는 교세확장경쟁 등으로 알력이 잦았다.)

<신문들도 대서특필>
그러자 공산주의자들은 대뜸 종교분쟁이라며 마치 큰 일이라도 난듯이 떠들어댔다. 또 각국의 신문들도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사건보고를 받은 나는 이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엘 자와 엘 하므라 지구는 카이로에 집중되어있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근교개발을 꾀하기 위해 이집트 정부가 건설한 위성도시다. 나는 80년에 이 지구를 시찰했는데 이곳 주민들이 카이로의 슬럼에서 빠져나와 위생시설이 완비된 새집에 살게 된 것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내 마음도 흐뭇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행복감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마치 극심한 종교투쟁의 중심지가 된 것처럼 알려졌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이곳 주민들 가운데는 회교도도 있었고 콥트파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당초의 싸움은 어느 회교도와 기독교도 개인간의 싸움이었다. 그 동기는 전혀 종교적인 대립감이나 적대의식 때문이 아니었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웃끼리의 사소한 싸움이었다. 한사람이 맞붙었던 싸움은 자연스레 두 사람의 편싸움이 됐는데, 싸움은 그정도에서 조용히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뜬소문이 나돌아 사태를 걷잡을 수 없도록 몰고갔다.
공산주의자들은 회교도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찾아가 콥트파 기독교인들이 회교도를 1백명이나 살해했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렸고, 기독교인들에게는 회교도들이 1백50여명의 기독교도들을 죽였다고 수근거렸다. 이 뜬소문으로 흥분한 회교도와 기독교인들이 이른바 종교싸움을 벌이게 됐던것이다.

<최대 규모의 숙청>
분쟁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자 나는 국가안보를 위해 일대 정리작업을 단행했다. 콥트파 교도와 정통회교도,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불순분자들을 체포한 것이다.(주=「사다트」는 암살되기 한달 전인 81년 9월2일과 3일 국내비판세력 일제검거에 나서 모두 1천5백여명을 잡아들였다.
집권이후 최대규모의 숙청이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엔 전 각료 9명, 야당정치인 10명, 콥트파 주교 8명, 목사 16명, 그리고「모하메드 헤이칼」전 알아람 지 편집장 등 언론인 10명 등이 포함됐다. 정부에 비판적인 콥트파 교주「세누다 3세를 강제 퇴위시켰으며 대 이스라엘평화협상을 반대한 회교광신도 집단을 포함, 7개 종교단체를 해체하고 교회나 사원의 정치목적 이용을 금했다.)
이들 조치는 헌법테두리 안에서 취해진 것이다. 콥트 교도들은 자신들의 법왕(교주)을 스스로 뽑아왔으며, 정부는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근래 콥트 주교는 정치지도자가 되기를 바랐는지 콥트 교도를 이집트사회와는 별개의 존재로 만들려 했다. 이때부터 일종의 종교적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교주는 해외의 콥트파 교도들에게 이집트정부가 콥트교를 이슬람교도와 차별해 박해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했다.
한편 일부 회교 정통파들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반정부행동을 일삼아왔다.
여기에 소련은 우리의 사회불안을 고조시키기 위해 종교분쟁으로 4백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등 선동하고 나섰다. 그래서 나는 소련대사를 추방하고 그들에게 협력한 정치인들을 검거한 것이다.

<학원가서도 물의>
검거된 사람 중「파드 에딘」같은 자는 군사반란까지 주장한 것으로 안다. 그는「파루크」왕 시절의 각료로 대표적인 부패정치인이다. 「낫세르」시절 특권언론인이던「모하메드·헤이칼」은 모든 정치평론을 독점해 마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알아람 편집장에서 물러나게 했다.
나는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지난 73년에 카이로대학교에서 이번과 꼭같은 수법의 선동으로 학원가를 들끓게 만든 것을 기억하고있다. 그때 그들은 카이로대학생 3명이 시내에서 맞아죽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과거 11년 동안 카이로 시내에서 학생이 죽기는커녕 단1명도 다친 적이 없었다.
공산주의 선동자들은 카이로 근교를 돌아다니며『회교도들이 기독교인을 줄였다』, 『기독교인들이 회교도를 죽였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분명하다. 전세계에 대해 이집트가 안전하지 못하다, 불안한 나라다 라는 점을 선전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자들에게 말한다. 『백일몽을 꾸지 말라. 이집트 국민들은 너희들이 종교문제로 분탕질 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집트인들은 어떤 종교전쟁이라도 이를 단호히 배격한다.』<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