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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의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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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의 예루살렘 호민관인 메살라. 두 사람의 전차 경주 장면은 영화 '벤허'의 압권이다. 이민족이란 운명 때문에 친구 사이에서 원수가 돼 버린 두 사람의 사투(死鬪)를 보면서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선명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 장면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대결이 흥미진진해서가 아니다. 리더십의 힌트를 얻었기에 그렇다고 한다. 경주에서 메살라는 전차를 끄는 네 마리의 흑마에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한다. 속도를 내기 위해서다. 반면 벤허의 손엔 채찍이 없다. 그는 고삐만으로 백마들을 다룬다. 그럼에도 전차의 속력은 빠르다. 노 대통령은 차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저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경기의 승패보다 애정으로 대하는 말과 채찍으로 대하는 말의 경기력에 주목했다. 이것이 영화일 뿐이고,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큰 시사를 받았다."

경주에서 벤허는 승리한다. 백마의 경기력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노 대통령은 "채찍보다 애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애정은 곧 '신뢰'라고 강조한다. "신뢰는 모든 조직의 기초"라며 "신뢰하면 신뢰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신뢰란 어떤 것일까. 영어 단어 'trust(신뢰)'의 어원을 보자. 그건 독일어의 'trost(편안)'이다. 신뢰는 편안함에서 생성된다는 얘기다. 사람 사이든 집단 간이든 편안한 관계라면 말이 잘 통할 것이다. 벽은 없을 것이고, 믿음은 클 것이다.

요즘 노 대통령의 '연립정부' 발언으로 정가가 소란스럽다. 대통령의 말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씨알도 안 먹힌다. 불신의 벽이 높아서다. 노 대통령은 벤허에서 신뢰의 리더십이 뭔지를 느꼈다. 그런데 왜 대야(對野) 관계에서 신뢰의 위기를 맞게 됐을까. 먼저 신뢰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지난해 5월 연세대 특강에서 "믿음을 바로 세우려면 말한 대로 행동해야 한다"며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이를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랬다면 대야 관계는 달라졌을 것이다. 연정(戀情)이 싹터 연정(聯政)을 꿈꿀 까닭이 없을 정도로 편안한 사이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일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