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6·25 전쟁 기념식이 동호인 모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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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6.25 전쟁 기념식은 햇볕정책 이후 점차 쪼그라들어 이제는 마지못해 하는 형식적 행사가 됐다. 올해의 기념식 역시 초라하게 치러졌다.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국무총리도 없었다. 체육관에서 썰렁하게 거행되는, 전쟁 기억과 회상의 의식(儀式)에 군의 최상 지휘자가 없는 맥빠진 기념식, 그것도 국가가 아니라 재향군인회가 주관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의 동호인 모임으로 전락한 기념식, 그것은 대한민국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였다. 백발이 된 참전용사들은 자신들이 '냉전수구세력''극우 호전주의자'로 불리는 현실에 긴 한숨을 내쉬며 허탈해한다. 나라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기념식의 핵심인 국립묘지 참배, 기념행사는 건너뛰고, 저녁 만찬에만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자리에서 그는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나마 거꾸로 이야기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무기가 아니라 의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노 정권은 스스로 주적(主敵) 개념을 지워 침략자를 '동지'로 승격시켰다. 최전방에 남과 북의 100만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데, 싸울 적이 누군지 모르게 만든 것이다. 이런데 좋은 무기, 막강한 화력이 소용 있을까. 다시 전쟁이 났을 때 우리의 청년들에게 어떻게 싸우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사실 노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임관식에 국무총리를 보내면서 집권 초부터 군의 주력과 거리를 두는, '이상한'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기념식의 메인 행사는 피하고, 뒤풀이 장소에만 출연하는 절묘한 '면피성' 연기를 연출한다. 서해교전 희생 영웅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에도 물론 가지 않는다.

반면 한국전쟁에 북을 도와 밀고 내려온 중국에는 무작정 몸을 맡기고, 남을 도와 경제 번영의 기반을 마련해 준 미국을 공공연히 적대시한다. 더욱이 남침을 시인도 사과도 하지 않는 북에 노 정권 핵심 인사들은 그야말로 '버선발'로 달려가 매달리고, 절절맨다. 불러주지 않나, 만나주지 않나 노심초사하는 모양이란…. 남북 접촉은 정치성 이벤트로 변질되고 있는 동안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전운은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국가의 꼴을 제대로 갖춘 나라들은 전쟁 메모리얼 의식을 장엄하게 치른다. 심지어 수십 년 전에 전사한 병사의 치아 하나라도 지구 끝까지 달려가 소중히 수집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군대에 가서 국가를 위해 전의를 불태울 군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전쟁 영웅들을 대접하기는커녕 미국의 개입으로 통일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무력통일론의 정당성까지 아이들에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국민이 전쟁통일론에 동의할까. 그리고 전쟁을 또 겪을 각오가 돼 있을까.

대한민국은 문제가 없는 나라는 아니다. 잘못된 것도 많았다. 정의롭지 못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위대함은 과거의 흠결과 전후의 폐허를 딛고 굳건하게 일어선 데에 있다. 그리고 5000년 가난의 질곡을 떨쳐 버리고 경제 대국,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재탄생한 점에 있다. 한강의 기적은 역사적으로 가장 긴, 지난 '평화의 50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미증유의 혼란, 국가 정체성의 위기, 한.미 관계의 변화, 시장의 반란, 시민 불복종,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의 어제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에서 파생돼 나오는 것들이다. 대통령은 해방 공간의 좌우 이분 시대에 적합한 이데올로그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체제의 무지개색 다원성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인으로 통치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룰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그것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으로서 우리는 대통령이 6.25전쟁 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주관하고 참석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매년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원인, 전쟁 예방책, 평화통일로 가는 방법을 마땅히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은 대통령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관열 강원대 교수.언론학

◆ 약력=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미국 텍사스대 대학원 석사. 미국 코네티컷대 대학원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