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사랑을 놓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윤제림(1959~ ), '사랑을 놓치다'

…내 한때 곳집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지명에 유의하자. 보은군 내속리와 명사산 돈황여관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 상거 삼만 리. 몇 번이고 윤회와 전생을 통해 '그대'를 만나려 하나 번번이 어긋나고 또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귀촉도'의 정한이 현대적으로 계승된 이 시편 속 불운한 사랑은 전혀 칙칙하거나 어둡지 않고 외려 밝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세속의 그 흔한 남녀 감정을 초월한 데서 비롯된다. 평이한 어법 속에 깃든 깊은 사유가 놀랍다.

이재무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