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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앞에 북한 문제 있다면 어떻게 풀어낼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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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에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엇갈린 시선을 던지며 경계근무를 하고 있는 남북한의 군인들. [중앙포토]

오늘날 외교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곳에서 제기되는 도전은 너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인 데서 잘못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 지구적인 통합의 이 시대에 심각한 외교적 긴장과, 가끔은 잔혹한 충돌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가 있다. 문제의 일부는 17세기 이래 국제 전략을 지배해온 서구의 외교적 전통의 근본적인 전제에서 유래한다.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서구식 사고의 틀은 경쟁을 핵심적인 원칙으로 상정한다. 서구 외교사의 전개에서 당연시된 게 있다. 패권을 차지하려는 나라는 승자독식의 투쟁으로 다른 나라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 기후변화 같은 공동의 관심사가 있는 전 지구적 공동체 시대에 적합한 것일까. 모든 국제적 교환 관계가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홉스적인 세계에서 이뤄져야만 하는가.

내 외교 경험에 따르면 도교, 힌두교, 그리고 무엇보다 불교와 같은 동양의 철학적 전통이 외교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을 제공한다. 불교는 경쟁 대신 조화를 강조한다. 또한 불교는 상호 연결된 세계의 외교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구체적인 관여(engagement) 전략을 제시한다.

선악 구도 넘어서는 게 인간 관계

불교적 접근법은 인간이 항상 협력만 하는 존재라고 순진하게 전제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모든 상황에서 진정한 진보를 달성할 잠재력이 있는 통찰력을 선사한다. 그러한 가능성은 관계의 이중성과 복합성을 살필 때에만 포착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선악 구도에 따라 단순화된 느낌을 전달하는 매체의 보도에 접한다. 이들 보도가 묘사하는 세계에는 암묵적으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해석 틀이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 관계의 심층 패턴은 그런 선악 구도를 넘어선다.

많은 사람들에게 외교란 무자비한 패권 게임이다. 그들에게 조화란 국가의 행위를 전략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한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화가 실제로 외교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국가 간의 조화라는 개념이 서구의 외교적 전통에서도 전혀 낯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달성하기 위한 외교적 목표는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는 평화적인 질서라는 염원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은유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협조’는 완곡한 표현에 불과했다고 이해하는 게 낫다. ‘협조’는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이 약소국 문제에 내릴 처분에 붙인 유쾌한 용어였다. 한 역사가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 협조 체제’가 말하는 조화란 “실제로는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합의한 바를 강압적으로 약소국들에 강요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교는 국제관계에 대한 그런 패권적 접근법이 간명한 존엄성과 조화에 대한 헌신보다 덜 효과적이라고 본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의 밑에는 보다 깊은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조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상징성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전진하며 실천한다면 국제정치에 대한 논의의 본질 자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체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전략가들은 국제정치가 제로섬의 틀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상대편 말들을 하나씩 가져오다가 종국엔 왕을 ‘체크메이트’한다. 영어 단어 ‘checkmate’의 근원적 유래는 “왕이 죽었다”는 페르시아어 표현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관계가 놀이라면, 동양의 접근법은 보다 품위가 있다. 공존과 공영의 가능성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웨이치(圍棋), 일본에서 고(碁)라 불리는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둑은 경쟁 상황에서도 적의 무자비한 제거가 아니라 상호 조화를 추구한다. 바둑에도 승자는 있지만, 바둑은 무수한 게임 양상이 마치 춤출 때처럼 무수히 펼쳐진다. 완전한 지배를 가정하지 않는다. 바둑에서 성공은 조화와 균형의 산물이다.

조화와 마찬가지로 균형이라는 은유는, 서구의 외교적 전통에서 오랫동안 외교의 한 가지 기예로서 자리를 차지해왔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개념은 유럽 강대국 간의 국제관계에서 지침 구실을 했다. 이 원칙에 따라 외교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동맹관계와 국제 문제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를 엮어냈다. 한 나라나 블록의 패권 부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외교가 추구한 균형의 본질은 이상할 정도로 한계가 있었다. 이 접근법은 오로지 기성 강대국 클럽의 목표와 이익에 도움을 줄 뿐이었다. 유럽 내 패권다툼이나 식민지 쟁탈전에서 다른 국가와 국민은 졸(卒)이나 판돈 구실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균형의 원칙 자체를 바람직한 목표나 지침으로 여기는 나라는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균형은 깨졌다. 균형이 깨지면 균형을 복원하는 게 항상 필요했다.

균형은 게임에 참가하는 경쟁자들이나 적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막는 수단이었다. 여기서 목표는 상대적 지위·권력의 서열에서 꼭대기에 도달하고 다른 경쟁국들의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유럽의 국제관계에서 유지되는 균형은 불안정한 균형이었다.

균형은 불교의 근본적인 가치다. 균형을 중시하는 인간사에 대한 불교의 접근법은 북한에도 즉시 적용될 수 있다. 많은 서구 전략가들은 패권적 사고법으로 평양 문제에 접근한다. 그들은 그저 북한을 ‘압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승리나, 최고 수뇌를 제거하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그런 접근법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에 수십 년 동안 개입했지만, 일방적으로 개입할 때마다 나중에 ‘역류(blowback)’가 수반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조화를 깨면 새로운 문제, 특히 보통사람들이 희생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연히 북한에 관한 한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차질이 생기면 더 큰 문제가 등장한다.

희망이 안 보일 땐 내면의 자아로 돌아가야

주미 대사로 재직할 때 나는 항상 불교의 지혜에 의지했다. 불교의 ‘마음챙김(念·mindfulness)’ ‘중도적 균형(balance)’ ‘순간 순간의 자각(awareness)’이 국제관계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 어떤 외교적 상황에서 중압감을 느낄 때, 상황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휴식을 취하면서 내면의 자아로 돌아가는 게 꼭 필요하다. 시간을 내 명상하고, 스스로와 평온한 관계가 되고, 평정심을 되찾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에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곤 한다. 중심을 잡기 전에는 심각한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누구하고 함께 일하건 나는 ‘윈윈(win-win)’ 상황을 상상한다. 적수를 파멸시키겠다는 환상을 갖지 않는다. 조화의 추구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전에 상상도 못했던 해결책을 발견하게 된다. 상호 연결된 오늘의 세계에서는 위험한 대결을 피하는 조화로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가치 있는 불교의 개념 중 하나는 ‘무심(無心)’이다. ‘마음이 없음’보다 정확히는 ‘고정된 생각이 없음’을 의미한다. 무심은 마음이 모든 것에 열려 있으며 마음이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점령당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가 되면 사람은 항상 중립적이고 차분하게 된다. 자아의 외부에서 오는 관점과 함께할 수 있게 된다. 편견을 넘어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충격과 욕설은 마음에 구름 끼게 할 뿐

첫 번째 단계는 외교에서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상대의 발언이나 행동 때문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여러분의 일부분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언행을 반사하는 거울이 돼야 한다. 거울은 자신이 반사시키는 이미지 때문에 짜증을 내는 일이 없다. 이미지는 왔다가 가는 것이다. 물론 이미지들에 대한 자각은 하고 있어야 한다. 이미지에 담긴 메시지나 방향의 변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에 대해서도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무심하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각할 수 있으며,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알게 된 사람은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마음을 대양(大洋)과 비유하는 것도 유용하다. 마음은 하루 종일 물결에 흔들리는 대양과 같다. 충격과 욕설은 여러분의 생각에 구름이 끼게 한다. 하지만 혼란스러움이 별로 없는 평정심 상태를 이루면, 대양은 하늘을 완벽하게 비출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감정이 휘젓지 못하는 마음은 온 세상을 놀라운 정확도로 비출 수 있다. 사물은 왔다가 간다. 사물이 오는 것과 가는 것을 내버려두면 본질을 잡을 수 있다. 자신과 상대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찰자가 될 수 있다. 대화 중에 에고(ego)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흔한 오류는 어떤 사건이나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집착하고 매혹되는 것을 정념(正念)과 혼동하는 것이다.

불교에 따르면 명상은 모든 직업에 도움을 준다. 심지어 도둑도 명상을 하면 더 잘 훔칠 수 있다! 다시 말해 명상은 가치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명상은 포커스와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불교의 수행은 그 어떤 특정 종교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과도 잘 어울린다.

어쨌든 도덕적인 판단은 관점의 문제다. 수천 년을 단위로 역사를 고찰하면, 어떤 사건이나 행위자에 대해 공평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실제 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순간에 집중한 상태로 가치 판단을 한다면, 여러분이 옳다고 본 그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게 한 달이나 1년 혹은 10년 후에 밝혀질 수 있다.

언젠가 북한 정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미국인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북한을 신뢰할 수 없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는 장소를 공격하고 체제 변화를 압박해야 한다.”

나는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 북한의 변모와 핵무기 제거라는 목표에 대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 다음, 그의 논리를 연장해보기 위해 질문했다. 우리의 행동은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나는 ‘북한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계속 되돌아가며 그와 의견을 나눴다. 어떤 형태로건 공영과 공존이 목표라는 내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또 한꺼번에 모든 것이 가능하진 않지만 윈윈 가능성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뜻을 그에게 전했다. 나는 그가 개진한 입장의 타당성 자체를 부인한 적은 없다. 나는 그저 철저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다른 접근법이 있다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켰을 뿐이다.

北 인권, 마음챙김의 큰 틀에서 봐야

나는 그가 한 가지 목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다른 여러 길을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그가 목표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남북한과 주변국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더 큰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미 대사로 일할 때 나는 한국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충분히 우려하고 있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큰 의미에서 인권문제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비극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 다음 우리가 만약 언론매체가 보도하는 이미지에 집착해 북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 뒤에 있는 보다 큰 제도적·문화적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충동적인 대응으로 의도와는 달리 인권문제를 중단기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챙김이란 인권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이란 단순히 선거권이라든가 임의로 체포당하지 않는 자유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영양 공급이 부족하거나 아사 위험이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인권을 누리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우리가 대답해야 할 핵심적인 질문이다.

불교는 모든 관계에 대한 장기적이고도 균형 잡힌 초점을 외교에 제공한다. 국제관계에서 진보는 달성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부처의 중도(中道·middle way)를 고려해야 한다. 국제관계라는 게임의 모든 참가자들에게 윈윈 가능성을 창출하고 극단의 선택을 피할 때 우리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전진할 수 있다. 한 가지 시각만을 고집하며 문제를 억지로 해결하려고 든다면, 또 공습에만 의지하려고 한다면 일시적인 것 이상의 결과를 얻기 힘들 것이다. 그 결과도 얼마 가지 않아 뒤집힐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감행한 행동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기 쉽다.

충동적인 반응, 승자독식의 관점, 일관성 없는 정책 목표는 인류의 공동 목표에 대한 우리의 보다 깊은 헌신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 점을 계속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력균형이 아니라 관점의 균형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들 사이의 진정한 조화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 전 주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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