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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0)|영월 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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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위선피과 오소감심』-.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절규에 찬 경귀가 바로 엄문의 가헌이다.
엄가의 12세손 엄흥도가 어린 왕 단종에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 앞에 서더라도 결코 두려워 않겠다던 가훈이 그대로 문중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까마귀밥이 되도록 『누구든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 때문이었다.

<선영도 모두 옮겨>
충의공 엄흥도. 그는 영월 땅의 호장(향직의 우두머리)이었다. 서릿발같은 엄명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지만 그는 거적에 쌓인 구왕의 시신을 수습, 동을지산(현재 단종의 묘가 있는 장능)에 염장한 것이다.
이어 그는 단종비사의 한을 품고 어린 핏줄 하나에 여생을 의지, 성을 갈고 영남지방 어디론가 홀홀히 떠나버렸다.
현종에 이르러 단종의 무덤이 봉능되고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단종의 주검을 수습했던 옛 사람을 찾았으나 엄씨들은 무슨 재난이 닥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는 가문의 족적을 적어둔 문적까지 없애며 자꾸만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단종 묘에 선영이 있던 엄씨들은 묘가 능으로 추봉되면서 사방 5리 안에 있던 개인 묘는 모두 옮기라는 어명에 선영까지 포기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 난리로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은 10세조까지의 묘를 모두 실전하는 아픔을 안고있다.
엄흥도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 때. 순조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란 호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엄씨 인구는 현재 전국 1만9천9백여 가구에 10만여 명으로 귀성에 속한다.
인구순으로는 49번째. 본관은 상주·하음·광주 등 60여 본이 전하나 모두가 영월 엄씨의 분파로 한 핏줄 자손들이다.
통일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들어왔던 엄시낭이 시조.
중국 한나라 대시인이었던 엄자능의 후예이자 당나라 상국 (국무총리급) 화음의 일족이었던 그는 당나라 현종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이를 인근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악사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는 당나라에 정변이 일자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내성군(지금의 영월)을 본거지로 가계의 문을 열었다.
이어 이 땅에서도 정변이 일어 여조가 개국을 보게되었다. 그는 여태조로 부터 내성군 (성주)으로 봉해져 영월 땅을 식읍으로 받아 이를 인연으로 영월을 관향으로 삼게된 것이다.
그 후손은 세 아들을 중심으로 맥이 갈라져 장남 태인은 고향을 지켰고 차남 덕인은 서울로 이주, 가계를 이었으며 3남 처인은 함경도로 이주, 현재 북한 엄씨의 대부분이 그의 후예인 셈이다.
여조에서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한 엄씨는 이조에 이르러서도 11세손인 유온이 개국공신으로 가선대부 도총제부·동지총제를 지내는 등 집안의 벼슬길에 해가 질 날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에 이르러 엄씨 가는 호된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죽음이 유온의 4대 손녀이자 성종궁의 귀인이었던 엄씨 등을 비롯 윤필상 등12대신의 간계라는 임사홍의 무간으로 이들 대신들과 함께 엄 귀인의 아버지 사직과 오빠 회·계 등 3부자가 참살을 당한다.

<갑자사과 때 시련>
어제의 충신이 오늘은 역적으로 몰려 단죄를 받게되는 이른바 역사의 제단에 피를 뿌린 갑자사과다.
이로 해서 엄씨 가는 한동안 빛을 잃은 듯 하다 중종에 이르러 누명을 벗게되고 16세손 흔이 대제학으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선조들의 맥을 다시 이어 내려간다.
『선으로 패한 일 보며 악으로 이긴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 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 된 일 아니하면 자연 유성 하리라』그의 시조 한 수가 「가곡원류」에 실려 후세에 전한다. 영조 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한명과 정조 때 서화가로 이름 높던 계응은 부자간.
특히 한명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한석봉 이후의 제일 가는 명필가로 고금의 서법을 집대성한『집고첩』과『만향제시초』등의 저서를 남겼다.
엄씨는 근세에 이르러 선지자의 집안으로 신문 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다.
이조 말의 개화파 인물, 엄세영은 국제정세에 밝았던 초기 외교가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고종22년(1885) 영국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는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고 일본 나가사끼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도웰」함대사령관과 담판하는 등 외교적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엄씨가 낳은 유일한 왕비인 고종비(영친왕의 생모이자 이방자 여사의 시어머니)는 우리 나라 여명기 사학의 선구자로 양정·진명·숙명 등을 설립, 오늘날 사학의 요람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현재도 엄규백씨가 양정고 교장으로 엄정섭씨가 진명학원 이사로 이를 지키고 있다.

<숱한 독립투사들>
안중근 의사와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선 의병장 엄인섭, 민족혼을 농락하던 이학로 살해, 순국을 한 엄순봉, 광복회사건으로 총독부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엄정섭은 독립의사들.
또한 장면 민주당 정권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엄상섭씨는 율사로 그리고 제3공화국에서 주일대사를 거쳐 내무부장관을 2번씩이나 지낸 엄민영씨는 외교가로 그 이름이 높았다.
현존 인물로는 역시 외교가로 활약했던 엄요섭씨, 도·부지사를 지낸 엄병길·엄건씨 등이 있고 엄기표·영달·정주·병학·대섭씨 등이 국회의원을 지냈다.
특히 엄대섭씨는 마을금고 창시자로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인물.
언론계에는 엄한준 원주문화방송사장을 비롯 엄복영 한국방송공사 군산방송국장 등이 있고 학계에는 엄영식(경희대문리대학장)·엄영석(외국어대경상대학장)·엄륭의(서울대교수)·엄정인(고려대교수) 엄운용(KIST교수)·엄정식(서강대교수)·엄정국(서강대교수)·엄대영 (중앙대교수)·엄장일(부산대학생처장)·엄구현(부산 동아대학원장)씨 등이 활약 중.
군 장성급으로는 엄영보 해군준장·엄용식 공군준장 등이 있고 예비역장성도 4명에 이른다.
재계에서는 엄상호 건영주택회장을 비롯, 엄대용(만수산업사장)·엄규회·(고려건설회장) ·엄종진(동양상호신용금고사장)·엄춘보(한일 철강회장)·엄숙자(신성철강사장)·엄의채(경동시장사장)·엄철순(상호기공사장)·엄흥섭(한양투자금융사장) 씨 등이 돋보인다.
글 임수홍 기자 사진 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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