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직접 출마해 보니 문제 많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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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리(심판) 땐 몰랐다. 직접 선수로 뛰어보니 알겠더라. 법과 현실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임좌순(사진)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은 별명이 '걸어다니는 선거법'이다. 1968년 9급 서기보로 선관위에 발을 들여놓았다. 내리 37년을 선관위에서 일했다. 2000년엔 실무 사령탑인 사무총장에 올랐다. 열 번의 대통령 선거와 열 번의 총선거, 다섯 번의 지방선거를 치렀다. 명실공히 정통 선관위맨이다. 선거법에 관한 한 누구보다 잘 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지난 4.30 국회의원 재선거 때 돌연 '선수'가 됐다. 열린우리당 후보로 충남 아산에 출마한 것. 한나라당은 "심판이 선수로 뛰느냐"고 비난했다. 그가 공천과 동시에 선관위에 후보 등록을 한 날은 4월 16일. 당초 열린우리당이 낙점한 이명수씨가 이중당적 문제로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하게 되자 긴급 '징발'됐다. 그가 선거운동을 한 날은 불과 14일. 결국 낙선했다.

임 전 총장은 26일 기자를 만나 "선거에 대해선 꽤 안다고 장담했는데 현장에 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선거법을 지키면 당선되기 어렵다'는 후보들의 푸념이 그냥 나온 얘기가 아니더라"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도 관여해 2003년 개정한 현행 선거법.정치자금법 등이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중연설회를 없애 신인들이 자신을 유권자에게 알릴 방법이 없는 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유권자와 후보가 직접 만나는 데서 부패가 생긴다고 판단해 정당연설회.합동연설회를 다 없앴다. 대신 TV와 인터넷 등으로 얼마든지 할 말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공천을 받고 지역에 내려가 보고 나도 놀랐다. 자발적으로 후보 사이트에 접속하는 유권자가 사실상 한 명이 없는 날도 있었다. 신인이 법을 지키면서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방법이 거의 없더라."

그는 "법을 지키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면 후보들은 편법.탈법의 유혹을 받게 된다"면서 자신도 고민했다고 말했다.

"아산에서 초.중.고를 나와 동창들이 많다. 친구들이 나를 돕겠다고 모였다. 그런데 법대로 하면 밥값을 각자 계산해야 한다. 후보는 물론 다른 사람이 밥값을 대신 지불해도 모두 법 위반이다. 불합리하다고 느꼈지만 평생 선관위에 몸담았던 내가 불법이나 편법을 쓸 수는 없었다."

임 전 총장은 후보와 유권자의 접촉을 지나치게 차단하면 선거 브로커가 활개칠 공간이 생긴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그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이 좋아도 지켜지지 않는 제도라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안으로는 "선관위가 노인회.부인회.새마을지도자 등 지역의 여론 주도층을 초청해 예비 후보들이 정견 발표를 할 수 있도록 하면 신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요즘 그는 정치관계법에 대한 연구 작업에 다시 몰두하고 있다. 그동안의 이론에 현장 경험을 가미하는 수정 작업인 셈이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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