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한·일 관계의 구심력과 원심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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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한국이나 일본 공항엔 '한.일 우정의 해'란 포스터가 크게 붙어 있다. 올해는 한.일 수교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열린 올 상반기 한.일 정상회담이 무척 냉랭하게 끝났다. 총 회담시간 두 시간 중 역사 문제에 1시간50분을 할애하고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것은 논의조차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7월 제주도 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엔 역사 문제를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겠다고 먼저 성의를 보였었다. 그에 상응한 화답은커녕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끈질긴 신사 참배를 비롯해 독도.교과서 문제에 대한 실망스러운 대응 태도가 이런 국면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하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역사적 결단을 바란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른다. 오히려 신사 참배는 고집을 부리는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돼 버렸다. 그동안 좋은 분위기에 취해 서로 긴장을 푼 점도 있다. 이번 문제는 이념적이고 정치적이기 때문에 쉽게 타결되기 어렵게 돼 있다. 한.일 관계가 그만큼 꼬여 버린 것이다.

한.일 간엔 이제까지도 이런 고비가 많았다. 그때마다 어떤 도도한 흐름과 결단에 의해 매듭이 풀리곤 했다. 즉 한.일 두 나라는 숙명적으로 이웃하고 있으며 싫든 좋든 불가분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두 정상이 회동했고 연내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정상회담의 모양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약간 기분 나쁘더라도 밖으론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이젠 할 말은 하고 섭섭한 감정도 분명히 드러낸다. 그것이 다소 거칠게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 곪는 것보다 오히려 건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임계점(臨界點)을 넘으면 위험하다.

이번 정상회담은 한.일 간의 달라지는 여건과 관계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정상의 정치적 기반과 스타일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 다 대중적 인기와 퍼포먼스를 중시한다. 그래도 과거엔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는 몇 가지 구심력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미안함과 죄의식이었다. 침략과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 대해 부채로 생각하고 그걸 보상해야겠다는 의식이 다소 있었다. 과거 일본 관료들이 한.일 관계에서 빡빡하게 굴 때마다 친한파 정치인들이 그걸 수습하곤 했다. 그들은 대개 보수우익 세력이었다. 비공식 채널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치세력이 확 바뀌었고 새 신뢰 관계가 아직 구축되지 않았다.

과거엔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큰 몫을 했다.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한국이 방파제 노릇을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큰 덩어리의 경협을 둘러싸고 실랑이를 벌일 때 한국의 방파제론이 먹혀들어 갔다. 미국도 은근히 그런 방향으로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의 세대 교체로 죄의식이나 미안한 감정이 많이 퇴색됐다.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소리가 나오고 그것이 우경화의 움직임으로 연결되고 있다. 젊은 정치인들 사이에선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는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다. 과거엔 긴밀한 한.미 동맹이 일본을 견제했는데 이젠 미.일 관계가 더 가까워졌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한.일 관계에서 구심력이 약해진 대신 원심력이 강해진 것이다. 위험 요소가 많아진 이런 상황 변화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번에 역사 문제는 그것대로 준엄하게 따지되 FTA 같은 실질적 문제도 같이 논의해 진전을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국내 경제사정이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번 정상회담 뒤 시원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걱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바로 직전에 있었던 미국과의 정상회담도 과거처럼 화기애애하지 못했는데 일본과도 서먹하게 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와 가장 긴밀한 관계인 미국과 일본 두 나라에 같이 소원해지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국제 관계에서 할 말 다하고 얼굴 붉힐 때 붉히려면 뒷감당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길 때 확실히 우리를 거들어 줄 우리 편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가.

지금 국제 간의 기류는 매우 묘하다. 급하게 달라지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해 냉정하게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 필요할 때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