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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연극계 흔든 한국식 '한여름 밤의 꿈'

중앙일보

입력

“중국에도 우수한 전통문화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작품을 못 만드나요?”
중국 베이징 서쪽 광안먼 부근에 자리잡은 ‘국가화극원(國家話劇院·우리나라 ‘국립극단’에 해당)’ 극장. 24일 극단 여행자의 ‘한여름 밤의 꿈’ 공연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중국인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 항의와 탄식에 가까웠다. 무대 위에 앉아있던 리우싱린 중앙희극학원 교수는 “'연극을 이런 방식으로도 만들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든다. 창작을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지, 우리가 고민해야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24, 25일 이틀간 ‘국가화극원’ 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을 한국 전통 미학과 연희 양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2002년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초연한 뒤 20개국 69개 도시에서 16만여 명의 관객을 만났다. 베이징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출자인 양정웅 극단 여행자 대표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에서 네 남녀의 사랑 소동이란 골격만 남기고 새 판을 짰다. 원작의 요정 대신 한국의 도깨비가 삼베옷을 입고 등장해 재기발랄한 난장을 벌인다. 허미어ㆍ라이샌더 등 주인공 이름은 항(亢)ㆍ벽(壁)ㆍ루(婁)ㆍ익(翼) 등 우리 별자리에서 따온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청마루 무대와 북ㆍ장구 등 국악기의 선율도 한국적 색채를 덧입히는 데 한몫했다.

베이징 공연은 한국어 대사, 중국어 자막으로 진행됐다. 이틀 모두 800석 객석을 채운 관객들은 웃음과 박수로 호응했다. 중간중간 배우들이 중국어로 대사를 하는 장면에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공연이 끝난 뒤엔 관객들이 연출가에게 사인해달라고 몰려들기도 했다. 24일 공연을 관람한 펑샹(31ㆍ회사원)은 “그동안 드라마와 가요만으로 한국 문화를 접했다. 처음으로 한국 연극을 봤는데 전율이 느껴졌다. 중국에서 한국 연극을 볼 기회가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반응은 한결 진지했다. 구춘팡 베이징대 예술대학 교수는 “지금까지 봤던 ‘한여름 밤의 꿈’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고 평했고, 추이멍치 로스트필름&ampamp;TV프로덕션 예술감독은 “중국의 연출자들도 전통과 국제적인 콘텐트를 과감하게 접목시키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중국의 유명 연극 연출가이자 국가화극원 부원장인 왕샤오잉은 “한국 연극이 중국 연극계의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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