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위안부 문제, 한·일 관계 새 출발의 첫 단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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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24일 청와대를 방문한 누카가 후쿠시로 회장(왼쪽) 등 일·한 의원연맹 대표단을 접견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내년이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데, 이제 정말 새로운 한·일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할 중요한 시간인 만큼 의원연맹 여러분의 많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누카가 회장, 서청원 한·일 의원연맹 회장, 박 대통령, 나오시마 마사유키 부간사장, 나카타니 겐 부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청와대에서 한·일 의원연맹 일본 측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회장 등과 만나 “한·일 관계의 상징적 현안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며 “이것이 한·일 관계 새 출발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국민 마음에 상처를 주는 퇴행적인 언행이 반복되지 않는 게 양국 신뢰를 쌓고 관계 발전을 해나가는 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다.

위안부 문제가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 배석한 한국 의원들에 따르면 누카가 회장도 이날 “아베 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식민 지배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각각 사죄·사과한) 무라야마(村山)·고노(河野) 담화(談話)를 계승한다. 대화를 통해 한·일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는 아베 총리의 구두 메시지를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박 대통령은 "과거에 정상회담을 개최한 후 오히려 관계가 후퇴했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통해 성공적 정상회담이 되도록 진정성 있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참석자들이 전한 문답.

▶박 대통령=“(구두 메시지를 전달받은 후)나도 만나고 싶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 54명이 살아계시는 동안 온전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조치가 있기를 기대한다.”

▶누카가 회장=“곧 국제회의가 3개(베이징 아태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가 있는데 정상들이 웃는 얼굴로 가볍게 만나고 외교채널을 통해 진정성 있게 상의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겠나.”

▶박 대통령=“좋은 얘기지만 성공적으로 가야 한다. 만나서 좋은 결과가 없으면 더 실망을 주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과거 그런 예도 있지 않았나.”

▶누카가 회장=“이해한다. 양국 모두 어려운 상황이니 물꼬를 트기 위해선 두 분이 만나서 가볍게 얘기해 외교채널에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하면 안 되겠나.”

▶박 대통령=“좋은 얘기지만 만에 하나 잘못되면 어떡할 건가.”

박 대통령은 “지금 생존해 있는 피해자 분들이 상당히 고령이고 이분들이 생존해 있을 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조치를 기대하고 있다”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를 다시 촉구했다. “일본의 반한(反韓) 데모와 ‘헤이트 스피치(특정 민족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는 연설)’ 등은 일본의 국격에도 맞지 않고 일본 대다수 국민도 찬성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누카가 회장이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라는 얘기를 해서 일본 측에 ‘대통령은 국가원수인데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겠느냐’고 상황을 설명해 줬더니 일본 측 인사들은 면담 후 ‘대통령이 엄격하다’ ‘(정상회담이) 쉽지 않겠는걸’이라고 말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 21일 방한했던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국장도 23일 아베 총리에게 “11월 국제회의(베이징 아태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실현하긴 어렵다”고 말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은 야치 국장이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을 만났지만 위안부 문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누카가 회장을 비롯한 일본 의원들도 야치 국장과 같은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이날 접견에는 누카가 회장을 비롯한 일본 측 대표단 12명과 한국 측 서청원 회장, 강창일 간사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친박근혜계 원로인 서 회장이 박 대통령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만난 건 취임 후 처음이다.

한·일 의원연맹 소속 일본 측 대표단은 25일 합동총회를 위해 방한했다. 이 자리에선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를 정부에만 맡겨 두고 특별한 안을 내지 않았는데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건 하나의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신용호·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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