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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북·미에 따돌림 당하자 클린턴에 화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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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TV로 중계되는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미국 대통령 뒤에서 통역을 하는 저 한국 사람은 누구냐"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가 바로 통 김(Tong Kim.한국명 김동현)이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 국무부의 한국어 통역관이 된 인물이다.

그는 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부터 아버지 부시 대통령, 빌 클린턴 대통령, 그리고 현재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미국 대통령 네 명의 한국어 통역을 했다. 한국 쪽으로 보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까지 다섯 명째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한국인은 아니다. 미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37년간을 한국에서 살았던 그는 국적과 상관없이 생각과 행동 모두가 온전한 한국인이다.

통 김은 '지난 20여년간 한국과 미국의 정상들이 만났을 때 언론에 보도된 것 이외에 도대체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하는 궁금증에 대해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 양국 정상들은 의사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통 김은 이달 말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오십대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70세다.

통 김과의 인터뷰는 18일 낮 북버지니아 애넌데일의 자택에서 4시간 동안 이뤄졌다. 그는 "아직은 밝힐 수 없는 많은 얘기가 있다"는 전제하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음은 통 김과의 인터뷰 내용을 본인 서술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YS가 호통 쳐 전쟁 막은 건 아니다=일반에 흔히 알려진 얘기가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4년 북핵위기 때 북한 공격을 준비 중이던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로 호통을 쳐 한반도 전쟁 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YS가 클린턴 대통령과 미국의 대북 공격에 대해 전화로 논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페리 미 국방장관과 권영해 국방장관 사이에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논의가 오갔었다. 한국은 분명히 반대한 것으로 안다.

정작 YS가 클린턴에게 화낸 것은 다른 상황에서였다. 94년 10월 북.미 간에 제네바합의(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고 그 대가로 경수로 2기를 지어준다는 게 골자)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의 친서를 북한에 써줬다.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다. 북한도 "우린 비밀을 잘 지킵네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따돌림 당한 걸 알게 된 YS는 클린턴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무슨 동맹이 이런 게 있노"라면서 화를 냈다. 당시 한국 측 통역이 당황해 YS의 말을 장황하게 다른 말로 바꿔 설명하던 기억이 난다.

◆ 오해 많이 산 부시식 표현=부시 대통령은 2001년 정상회담 때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호칭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논란이 많았다. 부시가 한국 대통령을 우습게 봤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부시는 평소에도 'man'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부시 대통령이 즉흥적이라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선 '죽이든 살리든(dead or alive)' 데려오라고 했다. 옛날 서부시대에 현상 수배범에게 사용했던 문구다.

그에 대해선 다른 사람도 아닌 영부인 로라 여사가 "대통령이 왜 그리 점잖지 못한 용어를 사용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부시 대통령은 또 "내가 텍사스 출신이라 해서 쌍권총으로 아무나 쏜다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2001년 정상회담 때 나는 'this man'이라는 부시의 발언을 '이 분은'이라고 통역했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첫 번째 정상회담을 할 때도 노 대통령을 지칭해 "He is an easy man to talk to"라고 했다. 나는 "말하기가 쉬운 상대"라고 통역하면서도 순간적으로 한국에서 문제 삼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 문장에선 "말 상대가 편안한 분"이라고 바꿔 말했다.

'쉬운 상대'라는 부분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서실장이 통역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불쾌해했다는 얘길 나중에 들었다. 부시 대통령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도 'easy ma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새겨둘 대목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얘기하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김정일은 연출가=북한에는 17번을 다녀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함께 방북해 '마담 새크러터리'(올브라이트 장관)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대화를 12시간 동안 통역한 일이다. 김정일에 대한 인상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소위 북한 사람이 말하는 통이 크다는 것이다. DJ의 머리와 YS의 배짱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그는 말할 때 문장의 끝이 매끄럽지 않았다. 아마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김정일은 "우리가 미국 치겠다는 게 아니다. 미사일 한 방 때리면 무슨 소용이 있나. 열 방을 때리면 무슨 소용있겠나"라면서 "미사일을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또 "미국 놈이라고 부르고 반미 하는 것이 잘못됐다. 우리 교육이 잘못돼 그렇다"는 말도 했다. 미국이 양국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고 하자 김정일은 그 단계를 건너뛰어 대사관을 개설하자고 했다.

김정일은 영화광이고 연출을 좋아한다. 아버지인 김일성을 선전 홍보하면서 영화적 기술을 익힌 것으로 안다. 그는 관중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면서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연출가와 비슷하다. 깜짝 놀라게 할 일이 없으면 사람들을 안 만난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입장은 바뀐 게 없다. 이번에 정동영 장관이 갔을 때 김정일이 한 얘기는 이미 2000년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했던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 위원장은 일부 맹동주의자가 일을 저질렀고 자기는 상관없는 듯 얘기하지만 북한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든 건 김 위원장이 다 결정한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북한은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다. 유교식 민족주의 군주국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안전보장은 물리적 침략에 대한 안전보장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들 체제에 대한 안전보장이다. 당시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입헌군주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었다.

◆ 한.미관계의 명암=한.미관계는 김영삼 정권 초반기에 좋았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원한다는 정치적 부담이 작지 않았다. 하지만 YS가 당선됨으로써 이런 부담에서 벗어났다. YS는 평생 민주화 투쟁을 한 정치인이고 초반기에 인기가 90%로 치솟았다. 당시 클린턴의 지지도는 60%에 불과했다. 클린턴이 일본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담(G7)에 참석했다가 제일 먼저 한국을 방문한 것도 그런 배경이 있다. 하지만 한.미관계는 핵협상을 하면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틀어졌다. 하지만 나중에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고 남북 간 정상회담을 주선해 주니까 한국 정부도 환영했다.

클린턴 후기에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양국 관계는 밀월로 접어들었다. 한.미 간에 대북 정책기조가 가장 접근했던 게 그때였다.

월간중앙 2004년 7월호에서 DJ 정부의 대북 정책을 총괄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6.15 정상회담 전 과정을 미국과 긴밀히 협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DJ가 클린턴에게 직접 알려준 적은 없다. 아마 다른 채널로 했을지는 모르겠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몇 달 전에 일본에서 클린턴과 DJ가 만났을 때 클린턴은 "APEC(아태경제협력체) 회담에 김정일이 참석하면 큰 뉴스가 되겠다"고 했고 DJ도 그 소리를 듣고 좋아했다.

노 전 대통령·부시 백악관서 테니스 칠때
떨어진 공, 부시는 줍고 노태우 그냥 서 있어

◆ 한.미 대통령들의 무대 뒤 모습=DJ는 클린턴을 적잖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생각하고 우정을 느꼈던 것 같다. DJ는 클린턴과 대화 도중 "임기가 끝나도 친구로 생각하겠다"고 얘기했고 클린턴도 덕담을 했다. DJ는 자기 생명을 살려준 게 미국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친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이 방한해 YS에게 "나는 일하느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고 하자 그는 "나는 아무리 늦게 자도 4시반이면 딱 일어난다"고 해 클린턴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레이건은 "나도 10개월 후면 은퇴하는데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니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레이건에게 "은퇴하면 나와 나카소네 전 총리와 함께 만나서 국제정세를 토론하자. 자리는 내가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노태우 대통령 때는 경호실장이 정상회담과 만찬장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노 전 대통령은 표준말을 쓰다가 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노 전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대통령 모두 테니스를 좋아했다. 한 번은 백악관 테니스 코트에서 두 정상이 테니스를 치는데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스스로 떨어진 공을 줍는데 노 대통령은 공을 줍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 내가 공을 주워주기도 했다.

워싱턴=김종혁.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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