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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국가재건 최고회의」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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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정이양은 5·16 초기부터의 숙제였다. 이것은 그들의 공약이기도 했지만 내·외의 압력이기도 했다. 아무튼 군이 정치적 야심에서 5·16을 일으킨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민정 약속이 필요했다. 그런 연유로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의 회담 다음날인 5월 23일 기자회견에서 민정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군대가 필요이상으로 오래 집권하지는 않을 것이며 빠른 시일 안에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인 24일 장도영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키 의해 미국을 곧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무렵 미국의 관심은 민정회복의 시기와 절차였다. 따라서 장 의장의 방미계획은 민정복귀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공식화하고 한걸음에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도 해결해 군정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의 방미계획이 미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된 것이어서 미국 정부를 놀라게 했다.
마침 「케네디」 대통령은 1주 후 유럽 순방이 예정된 때였다. 미국은 장 의장의 방미를 거부했다. 면담의 준비가 안 된 것도 문제였지만 장 의장과의 회담의 실효성에도 의문을 가졌던 듯 하다.

<장 의장 방미 해프닝>
당시의 최고위원 유원식씨 증언. 『장 의장의 방미계획 발표직후 박 소장은 유엔군 사령부에 「장 의장은 군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다」라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읍니다. 그 당시 내가 들은 바로는 박 소장의 뜻을 유양수 소장이 영문밀서로 작성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이런 증언에 대해 유양수씨는 『금시초문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고 밀서 같은 건 분명히 없었다』고 했다. 그것은 어쨌든 그 무렵 미 당국도 혁명의 리더가 장 의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들이 겹쳐 장 의장의 도미는 이뤄지지 않았고 자연 민정이양 시기는 미결문제로 남아있었다.
이 때부터 민정이양시기가 비공식으로 거론됐다. 장도영씨는 최근 『군정기간을 6개월로 잡으려했다』고 회고했다.
『나는 우리군대가 잘 훈련돼있어 6개월이면 질서회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봤어요. <6개월 후에 선거를 치르고 새 민간정부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켜보자. 여러 말 말고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라>고 최고위원들에게 주장했지만 주체들은 그게 아니었어요』라는 것이 현재 미국에 있는 장씨 주장이다.
그 무렵 장 의장이 조속한 민정복귀를 주장했던 것은 여러 증언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가 최고회의 의장외에 내각과 국방요직을 겸하고 있던 것도 단기군정을 전제로 해서였다. 확실히 5·16 직후의 분위기는 단기군정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6월초 AP통신은 8·15를 전후해 민간 과도정부가 구성될 것이라고 유력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뉴스는 최고회의를 발칵 뒤집어놨다. 『최고 위원들도 모르는 구상들이 어디에서 새어 나갔느냐』는 것이었다. 일단 부인성명을 낸다는 것이 그날 격론 끝의 결정사항이었다. 6월 2일 최고회의는 『정권을 조속한 시일 내에 이양하는 것은 명백한 일이나 그 시기를 고려중이라는 보도는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성명을 냈다. 조기민정 복귀라는 희망적 억측을 뒤집는 뉘앙스의 발표였다. 이 때부터 최고회의는 민정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에 휩쓸렸다.
민정문제에선 우선 용어부터 달랐다. 장도영 의장은 「민정복귀」라는 용어를 썼다. 『군이 궐기한 것은 급진적인 혁신계와 학생 등의 용공적인 자세가 반공기반을 뒤흔들어 놓은데 있었다. 따라서 군은 이런 세력의 뿌리를 잘라내고 즉시 원대 복귀함으로써 진정한 민정복귀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반해 박정희 부의장 측은 「민정이양」이라는 말을 썼다. 『민정의 안정기반을 만드는 것이 5·16의 목표다. 용공세력은 사회혼란을 틈타고 있으니 사회혼란의 요인이 되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수술을 해야하고 그러자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초기 최고회의를 포함한 군의 분위기는 조속한 민정복귀였다.
서울지구 범죄수사대장이던 방자명씨의 증언.
『민정복귀 논의에서 장 의장과 5기 그룹들은 단기간을 주장했어요. 8기 중에서도 길재호·오치성씨 등은 이 그룹에 속했다고 기억됩니다. 당시 박영수 대령(현 서울시장) 같은 이는 경남 경찰국장으로 내려가라니까 <왜 나를 민간인 직책에 보내 몇 달 후에 예편시키려 하느냐>고 헌병감에게 항의를 했어요. 그 무렵 모두가 군정은 곧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에 반해 <단기군정은 말도 안 된다. 6년은 해야 민정이양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내세운 이가 김종필씨지요. 이석제씨도 김씨와 같은 의견이었고…어쨌든 장 의장이 민정복귀의 이니셔티브를 잡아갈 듯한 분위기를 주체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우리들 분석이었습니다. 이것이 장도영 실각의 가장 큰 요인이 됐구요.』
그러던 민정논의는 장 의장의 실각으로 그 분위기가 장기 쪽으로 기울기는 하지만 역시 견해차이는 두드러졌다.

<권력의 맛은 꿀단지>
김윤근씨(당시 준장·최고위원)의 증언.
『민정이양시기에 관한 최고위원들의 의견은 천차만별이었어요. 길게는 「5년 설」, 짧게는 「2년 설」이 있었고 이 양쪽을 절충한 「3년 설」도 있었지요. 아마 최고회의 심의과정에서 한가지 정책결정을 놓고 이처럼 의견이 서로 엇갈렸던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도 명패가 나는 등 회의분위기가 심각하고 험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5년 설」을 주장하는 측들은 <최소한 5년은 군정을 해야 개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죠. 이에 대해 「2년 설」 측은 <권력의 맛은 꿀단지 같은 것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2년 이상하면 우리도 부패해지기 마련이다>하고 맞섰죠. 결국 2년으로 결정이 되어 「8·12 성명」이 나온 겁니다. 당시는 최고위원들도 몇몇 사람을 제외해놓고는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상황 역시 2년 이상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때고…. 그런데 구악이 일소되자 신악이 생겨 창피한 꼴이 되고 말았죠.』
당시 최고위원 J·H씨의 회고.
『그 무렵의 일이지요. 박 의장은 이주일 부의장 김동하 소장 셋이서 술을 나누다 <여보 이 부의장 우리는 모두 군에 돌아가는데 혹시 수립된 민정이 잘 해 가는지를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얘기를 했어요. 어쨌든 그 때는 누구 없이 원대복귀라는 전제아래 민정의 시기를 논의한 순수한 토론이고 결정이었지요.』
이런 곡절을 거쳐 군정 2년이란 기간이 정해졌다. 이 결정을 앞당겨 발표한 것은 각종 뜬소문 때문.
최고위원이던 유원식씨의 증언.
『당시 최고회의에선 민정문제나 최고위원의 원대복귀구상은 일체 개인·의견을 말하지 않기로 돼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박 의장에게 들렀더니 <종필이가 말조심을 안하고…>라고 언짢아해요. <무슨 일입니까>고 했더니, <이 친구가 어느 술자리서 혁명과업을 성취하자면 최소한 4년은 필요하다고 한 모양이야> 그러는 거예요.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찍 발표하기로 했지요.』
이런 경위로 박 의장은 7월 19일 『8·15이전에 민정이양 스케줄을 밝히겠다』고 공표, 세간의 뜬소문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른바 「8·12 성명」을 발표했다.
8·12성명은 『그로부터 2년째가 되는 63년 여름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공약이었다. 이 성명에서 박 의장은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라는 헌정의 기본방향도 제시했다. 거기에다 『구 정치인 중 부패부정한 정치인은 정계진출을 방지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취한다』는 계획까지 포함시켜 공표했다. 2년 후 민정이양으로 일단 방향이 잡혀지면서 그에 따른 문제의 검토는 김종필씨에가 주어진 과제였다. 최대의 숙제는 2년이란 기간에 최고회의의 시책을 계승하고 일부일지라도 혁명주체들이 그 핵심에 참여해 민정을 주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민정구상과 그 준비」로 좁혀 문제를 검토했을 때 2년은 너무 짧았다.
거기에다 혁명정부의 시책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 몇 가지 실례. 『반공태세의 재정비 강화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구 정치인의 부정부패조사는 실패였다. 민주당 각료와 제2공화국 정계요인들을 모두 조사했는데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은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었으나 개인적 치부사례는 거의 밝힐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야당생활을 하다 집권한지 9개월밖에 안돼 부패할 시간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최고위원 L씨의 회고), 『민생고의 시급한 해결을 포함해 1차 5개년 계획도 수행하고 민정이양 준비도 하려니까 자금이 필요했다. 우리는 감추어져있는 부정자금이 많을 것으로 추측했다. 특히 ×교와 재벌·고급공무원이 돈을 감추고 있으리라고 봤다. 그 돈을 노출시켜 산업 자금화 하고 또 그 밖의 작업에도 요긴하게 쓰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런데 정작 감춰진 부정자금은 나오지도 않았다.
우리 딴으론 극비에 한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교들에겐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갔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화폐개혁은 허약한 경제에 충격만주고 목적은 이루지 못한 채 실패했다. (최고위원 유원식씨의 회고). 『혁명정부가 그 당시 민원의 하나였던 병역기피자의 처리를 과감하게 단행했다. 공무원만도 9천여 명의 병역미필자를 해임했다. 혁명정부는 이들을 국토건설단으로 보내 국토건설과 병역미필자 처리를 동시에 해결하려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예산낭비에 그쳤다.』(혁명내각의 차관이던 K씨의 회고).
K씨의 회고를 뒷받침하는 당시 CID 모 지구파견대 H씨 증언.
『건설단에 대한 보급이 불충분했고 그나마도 건설단 간부들이 유출을 시켜 형편이 말이 아니었어요. 영주지구의 건설단 5지단 6분단 소속의 대원 67명이 집단 늑막염에 걸렸다고 최 모 상사가 보고해 왔습디다. 그 때까지 조사된 진상보고서를 올렸지요.
상부에선 처리시까지 「비」로 하라는 것이었는데 상경하던 기찻간에서 대구 모일간지 기자에게 내가 얘기해 버렸어요. 이게 신문에 보도되고 나는 기밀누설로 구속됐지만 건설단은 그 며칠 후 해체되었지요.』 그러나 당시 최고회의 자문위원으로 있다가 건설단원이 됐던 정소영씨(전 농수산부 장관)의 얘기는 다르다.
『군대식 편제에다 군대식 생활을 했지만 심한 노동은 시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몇 달 해보니까 임금을 주어 전문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최고회의 자체의 반성론이 나와 5개월만에 해체된 것으로 압니다.』
어쨌든 이렇듯 혁명정부의 중요시책들이 흔들렸다. 이것은 민정준비에는 커다란 장애요소였다. 그 위에 대부분의 최고위원들은 원대복귀를 작정해 민정참여 구상엔 소극적이었다.
함구령이 내렸음에도 원대복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Y 최고위원의 회고.
『민정문제를 포함해 최고의원들의 원대복귀 구상도 미묘해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읍니다.

<군 복귀는 인기발언>
62년 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공화당 창당설이 시중에 파다하게 번져 정가가 술렁이던 때였죠. 따라서 원대복귀에 대한 회의론이 일고 시비가 많았던 시기였어요. 이 때쯤 나는 헌법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기찻간에서 모 일간지 기자를 만났지요. 그는 내가 입을 열지 않는데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정권이양 후의 내 거취를 묻는 거예요. 그는 <보도는 절대 안 할테니, 개인의견만 말씀해주십시오> 합디다.
그래서 <나는 군인이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민정이양 후 원대복귀 한다>고 했지요. 그랬는데 그로부터 한달 반쯤 지난 후 「Y최고위원은 원대복귀 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보도된 거예요.
일부 최고위원들이 고 빈축을 해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그 때는 원대복귀가 인기발언이었으니까요.』
이런 분위기는 혁명과업과 민정이양 구상에 불협화로 나타났다. 말썽은 끊이지 않고 모두의 관심과 의혹은 김종필씨의 민정구상에 쏠렸다. 마침 그럴 무렵 한 사건이 최고회의 우위를 흔들어 놓는다.
김윤금씨(전 최고위원) 회고.
『부정축재 처리위원회는 위원장이 이주일 소장이었죠. 그 밑에 판사와 세무공무원으로 구성된 심사반, 현역 군인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있었습니다. 부정축재 처리위원은 나를 포함해 김진위 준장 송찬호 준장 유원직 대령 세웅 대령 이석제 중령 등 6명이었죠. 조사단장은 이지순 대령이었고…. 부정축재 처리가 거의 완결되어 갈 무렵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읍니다.
10월 초순으로 기억됩니다. 박 의장이 부정축재처리위원 6명을 전원 소집합디다. 회의실로 올라갔더니 김종필씨가 브리핑차트를 펼쳐놓고 서있었고 박 소장은 위원들에게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느냐>고 핀잔을 하고있습디다. 김종필씨의 설명에 의하면 부정축재조사단원 중 양모 대령 등 4명이 조사대상자들로부터 뇌물을 먹고 눈을 감아줬다는 겁니다.
그는 관련장교 명단, 수뢰액수 등을 발표하고 나서 <부정축재자 조사는 재심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한마디했죠. <부정축재 처리위원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모든 실무조사는 조사위나 심사반이 한 것이 아니쟎냐.
조사단이 조사한 것을 심사반이 심사하고 위원들은 심사결과를 보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판정을 내렸을 뿐이다. 조사 도중에서 부정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했지요. 그리고 <부정축재 처리법에는 재심을 못 하도록 못박고있는데 이제 와서 재조사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제정한 법을 우리 스스로 모독하는 행위다>고 했지요.
결국 그해 10월 26일 「부정축재 처리법 중 개정법률」이 공포 됐습니다 만 이후부터 최고위원회는 격이 떨어지고 말았지요.』
이로부터 민정준비는 최고회의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진행 된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공화당의 사건조직 등 혁명주체를 민정으로 이끌어 가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사자인 최고위원들이 소외되었기 때문에 뒷날 심한 갈등으로 번지고 만다.
그리고 이런 요동 속에서 박 의장의 거취결정도 번의가 거듭되고 군정 연장결정과 잇단 취소의 파동을 겪는다. 그리고 그 갈등과 파동 속에서 주체들은 「원대복귀」 「민정참여」 「정치은퇴」의 세 갈래로 갈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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