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모습 드러낸 「갸야의 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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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역사 멀리에 밀려있던 가야문화가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대구 계명대 박물관 전시실-.
1천 5백년 동안 땅속 깊숙이 묻혔던 가야 금동관이 금빛 현란한 원형으로 복원돼 감격스런 먼 옛적 조상들의 얼을 되새기게 하고있다.
가야 문화권 개발의 서광과 함께 우리 스스로의 놀라운 문화재 보존 과학기술을 동원, 처음으로 복원된 가야문화재들인 계명대 박물관의 고령 지산동 고분 출토 금동관과 철제 갑옷 및 투구-.
78년 출토당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던 이들 귀중한 문화재는 이제 갓 만들어진 듯한 본래의 모양을 되찾아 머리카락 같은 정교한 음각의 문양까지 선명히 드러내면서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자랑한다.
나뭇가지 모양의 광배형인 금동관(높이 7.5cm, 전면 폭 11.7cm)은 발굴당시 30여 조각으로 깨진 채 온통 청동 녹이 덮여있어 전혀 금동인지 조차를 식별할 수 없었다는 것-.
X레이 촬영 등을 통한 세부조사결과 금도금 막을 비로소 발견했고 계명대의 김종철 박물관장과 이오희 연구원이 79년 6월부터 6개월 동안 미국으로부터 각종 약품을 공수, 녹을 제거한 후 조각들을 찾아서 제 자리에 접합시킴으로써 완전 복원했다.
이 가야 금동관은 관 전면 둘레와 가운데에 파상 점선문양을 정교히 음각 했고 관식이 사실적인 나뭇가지 모양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양식은 신라금관에 그대로 전승돼 보다 기하학적인 도안과 수식의 찬란한 신라금관을 남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야 금동관은 신라의 금관 및 문화원류를 찾아 올라가는데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이기도 하다.
지난해 초 복원을 완료한 가야시대의 투구와 갑옷은 자성과 금속성이 전혀 없는 부식상태의 1백 20여 조각으로 분산된 출토유물이었다.
1년 동안에 걸친 복원작업으로 재질을 강화시키고 없어진 부분은 인조수지의 파편을 만들어 정형함으로써 원형을 복원했다.
복원된 투구의 크기는 높이 15cm, 좌우너비 20.5cm이며 갑옷은 높이 46cm, 가슴둘레 1m 20cm, 허리둘레 1m-.
이들 가야투구와 갑옷은 흔히 일본 사학계가 가야에 임나라는 통치부를 두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고고학적 증거로 제시하던 일본 무사들의 갑옷보다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판명 돼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중요자료가 되고있다.
계명대의 가야 문화재 복원은 아직도 거의 황무지 상태인 고대 가야사 연구를 자극하는 훌륭한 계기일 뿐 아니라 일본의 대한사관을 바로잡을 한국 사학계의 분발을 촉구했다는 의미에서도 훌륭한 쾌거였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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