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계동(桂洞)은 북촌의 한옥들, 40년 넘은 세탁소, 새로 생겨나는 카페와 식당들이 공존하는 동네다.
“시간의 층이 겹겹이 쌓인 100년의 지층(地層)” 환경·조경 디자이너인 서준원(36·여)씨는 계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1914년 계동이라는 명칭이 등록된 지 올해로 100년. 그간 이 공간을 스쳐간 시간들은 저마다 흔적을 남겼다. 서씨는 뜻이 맞는 사진작가 강다원(32·여)씨와 지난 14개월동안 계동을 조사해 ‘계동 100년, 시간을 품은 지도’를 만들었다. 100곳의 명소를 네 가지 색으로 표시했다. 일제시대, 한국전쟁·새마을운동, 산업화 시대, 현재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눴다. 한 장소가 변한 곳은 여러 개의 색으로 표시했다. 공간의 이야기를 발굴해 하나로 잇는 작업(공간잇기 프로젝트)이다. 서씨는 지난해 말 7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며 받은 퇴직금으로 이 작업을 해왔다.
서씨를 단박에 사로잡은 건 2010년 전통방식으로 갓 지은 한옥 벽과 70년대 지어진 목욕탕인 ‘중앙탕’의 벽이 맞닿아 있는 풍경이었다. “한 공간에서 과거와 현대가 살을 부대끼고 있는 모습이 좋았어요. 사람들이 낡았다고만 생각하는 벽돌 건물의 아름다움도 발굴하고 싶었죠.”
계동은 궁 옆의 동네가 다 그렇듯 이야깃거리가 많다. 창덕궁 돌담길의 빨래터가 대표적이다. 서씨는 “계동·원서동 지역의 아낙들은 동네에 개울이 많은데도 꼭 이곳에서 나오는 뿌연 물로 빨래를 했다”며 “임금님이 쓴 물로 내 가족의 옷을 빤다는 건 이 동네 사람들만이 부렸던 작은 호사였다”고 설명했다.
계동의 ‘물나무 사진관’은 명성황후가 태어난 터다. 이 사진관의 김현식 실장은 ”이 곳은 원래 큰 한옥 사랑채였는데 1960년대에 양은냄비 공장으로 바뀌어 동네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다시 시계공장을 거쳐 독서실로 이용됐었다“며 ”토박이 손님들이 가끔 와서 ‘내가 앉아 공부하던 자리에서 술을 마시니 행복하다’고 할 때 동네의 긴 역사를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적지않은 이야기거리들은 묻혀있다. 창덕궁 1길 대로변에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집터 표석은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서씨가 조사해서야 집터가 현재의 ‘안동칼국수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 여운형 선생과 ‘안동칼국수’를 알고 있지만 둘을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옆의 보헌빌딩은 1945년 해방 후 몽양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한 곳이기도 하다.
서씨와 강씨가 모은 계동의 이야기들은 지도, 사진, 영상으로 재탄생했다. 일러스트 작가 강혜숙씨는 이야기를 토대로 계동 지도를 그렸다. 지도에 91번으로 표시된 언덕길에 올라가 뒤를 돌아보면 눈 앞에 기와구름이 펼쳐진다. 93번 골목에는 벽화와 웃는 계량기 등 소소한 볼거리가 있다. 상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gongganikki.com)에서 확인 가능하다.
서씨는 지난 달 이 작품들을 모아 첫 ‘공간잇기 전시회’를 열었다. 호응이 좋아 24, 25일 북촌문화센터에서 앙코르전을 연다. 계동 일러스트 지도도 현장에서 받을 수 있다.
상업화의 바람에서 슬쩍 비껴왔던 계동이지만 지난 주에는 스타벅스가 재동초등학교 옆에 문을 열었다. 프랜차이즈 업체가 처음 들어선 ‘역사적 사건’이다. 만해당 게스트하우스 주인 이유리(45)씨는 “외국인 숙박객들도 이곳 골목을 누비는 야채 트럭, 두부장사 등 사람 냄새 나는 풍경을 좋아한다”며 “새 시대가 한 겹 더 쌓여도 계동만은 계동의 분위기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