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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가 뿔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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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사회에디터

역사가 모처럼 대접을 받는다. 삼성·현대 등 대기업들이 올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채용시험에 역사 문제를 냈다. 수능에서 한국사 채택률은 평균 10%대(지난해는 7%)다. 역사 공부를 등한시했던 응시생들이 진땀깨나 뺐을 터다. 현재 고1이 대입을 치르는 2년 후에는 한국사가 필수가 된다. 만시지탄이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지만 걱정이 앞선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아서다. 학계·정치권·교사들이 좌우로 갈려 싸운다. 교과서 발행을 국정(國定)으로 할 것이냐 검정(檢定)으로 할 것이냐가 쟁점이다. 학생은 안중에도 없다. 보수 진영은 국가가 주도해 발행하는 교과서로 교육시켜야 한다며 국정을 지지한다. 반면 진보 진영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중립성에 배치되는 발상이라며 민간 발행 도서를 국가가 심사하는 검정을 주장한다. 국정을 짝사랑하는 교육부는 눈치만 보고 있다.

 헛바퀴 돌고 있는 역사 교과서 논쟁은 검정 교과서 하나가 불을 지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끝에 지난해 말 검정을 통과한 보수의 상징이 된 교학사 교과서다. 올해 한국사를 새로 채택한 전국 1794개 고교 중 부산의 부성고가 유일하다. 우파에게는 우국학교, 좌파에게는 친일학교라는 극단의 평가가 난무했다. 부성고의 현재가 궁금했다. 34년간 교단에 선 이 학교 이인호 역사 교사의 얘기를 들어봤다.

 -수업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전교생 580여 명 중 1학년 240명이 일주일에 세 시간씩 두 학기째 공부중 입니다.”

 -학교가 갑자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 부담이 컸겠습니다.

 “교사도 학생도 놀랐죠. 지금은 관심이 잠잠합니다. 교과서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비교해가며 가르칩니다.”

 -교과서 논란이 여전합니다.

 “충분한 기간을 갖고 집필해야 돼요. 기본은 팩트(사실)입니다.”

 이 교사는 객관성이 충실하면 가르치는 데도 배우는 데도 탈이 없다고 했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역사가 랑케(1795~1886)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사학자의 책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교육부가 조만간 발표 예정인 역사 교과서 발행 방식은 ‘태풍의 눈’이다. 국정은 북한·베트남 등이 쓰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1974년 박정희 정부부터 30년간 국정체제로 하다 2003년 검정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되돌리면 정권 입맛에 따라 역사를 주무르려 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정치가 역사를 가지려 하니 탈이 나고, 정사(正史)가 정사(政史)로 변질될 수 있다.

교학사 파동에서 보았듯 검정도 문제다. 수정·보완 과정에서 오·탈자를 포함해 1400건을 뜯어고쳤다. 독도를 분쟁지역인 것처럼 기술하기도 했다. 이런 교과서에 정부가 도장을 찍어줬으니 오해를 살 만도 하다. 민간 출판사도 힘들다. 통상 2000만원인 검증비용까지 댄다. 그러니 돈을 아끼려 한다. 몸값이 싼 신진 학자에게 짧은 기간에 집필을 맡긴다. 내용이 부실해지기 마련인데 검정도 꼼꼼하지 못하다. 좋은 책이 나올 리 없다.

 그러니 역사가 뿔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안은 없을까. 우선 교과서 편찬 독립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정권과 정당, 이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기구를 설립해 영속성·독립성·자율성을 보장해 주자. 그리고 좌우를 아우르는 당대 최고의 필진을 구성해 최고의 대우를 해주자. 집필 전 학자의 양심을 걸고 치열하게 접점을 찾아야 한다. 역사 교과서는 객관성과 균형감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근·현대사 비중을 낮춰야 한다. 예전에 30% 정도였던 비중이 50~80%나 된다. 좌우 갈등의 근인이다. 전국 6000여 명의 고교 역사 교사도 재교육하자. “태종태세문단세…”와 같은 암기식 수업을 추방해야 한다.

반만 년의 우리 역사는 자랑스럽다. 아픈 상처도 많다. 그런 역사를 정치가 뿔나게 해서는 예가 아니다. 복잡한 일일수록 쉽고 간명하게 풀라고 했다. 『주역』에 나오는 이간지도(易簡之道)이다. 역사 교과서의 핵심은 원칙, 즉 팩트다.

양영유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