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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풍구 높이 1m 남짓 … 전문가 자문 없이 건설사가 설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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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철제 덮개가 무너져 내린 판교테크노밸리 유스페이스 광장의 환풍구에 대해 18일 긴급 점검이 있었다. 18.7m 깊이의 환풍구 내부를 살피기 전 인부들이 미리 발판 등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다. 최정동·김춘식 기자

환풍구 덮개가 부서지면서 27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도 성남 판교테크노밸리 유스페이스 야외공연장을 중앙SUNDAY 기자가 18일 찾아갔다. 이곳에서 만난 목격자들의 증언, 경찰 수사 내용, 전문가들의 진단 등을 토대로 사고 원인과 문제점을 짚어봤다.

위에서 내려다본 환풍구 안은 컴컴했다. 사고 이튿날 찾아간 현장에는 환풍구를 중심으로 경찰 40여 명이 배치돼 있었다. 관계 부처 공무원과 건축 기술사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문제점을 살폈다. 광장은 무대가 놓여 있던 곳을 기준으로 가로 24m, 세로 32m, 면적은 200평(768㎡)이 조금 넘는 둥근 모양의 부지다. 중간중간에 지름 40㎝짜리 두꺼운 가로등 다섯 개가 놓여 있다. 얕게나마 경사도 있다. 무대 쪽 지대가 가장 낮았다. 무대가 70㎝ 안팎 높이였다고 해도, 뒤쪽에선 가수들의 공연을 보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사고가 난 환풍구는 무대에서 직선 거리로 27m 떨어진 곳에 있다. 광장 지대를 기준으로 하면 2~3m가량 높은 곳에 있지만, 인근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 위 인도에선 기껏해야 1.05m 높이다. 일반 성인 여성도 손바닥으로 강하게 짚고 뛰어오를 수 있을 정도다. 환풍구 옆엔 화단이 있었다. 여기엔 현수막이 걸려 있던 데다 나무와 가로등 때문에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환풍구 앞 시야는 트여 있었다.

건축구조기술사 한 명이 다가와 환풍구 벽을 가리켰다. 사고 당시 사람들이 밟고 있던 철제 덮개는 전문용어로 ‘스틸그레이팅’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것이 놓여 있던 환풍구 안쪽 벽 가장자리가 손바닥 크기만큼 깨져 있었다. 이 기술사는 “대개 스틸그레이팅은 7~10㎝짜리 규격에 맞는 것을 설치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것을 받치는 구조물이 문제였을 수 있다”며 “대충 덮어놨던 것일 수도 있어서 살펴보러 왔다”고 했다. 김영민 기술사는 “환풍구는 구조시설물 전문 엔지니어가 건설해야 하지만 건설사 측에선 별도로 자문하지 않았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국회에도 추락 위험 18일 국회의사당 4층 중앙의 난간 모습. 의사당 건물 중앙은 3층 로텐더홀(중앙홀)부터 7층의 돔 지붕까지 뻥 뚫려 있는 구조다. 그런데 난간이 너무 낮아 늘 추락사고 위험이 있다. 중앙SUNDAY 측정 결과 난간 높이는 약 90㎝로 어른의 허리 정도다. 여기엔 ‘안전사고 주의’란 종이만 붙어 있을 뿐이다. 바닥도 미끄러운 편이다.

주관사 간부, 행사 전날 안전교육만
축제 기획자들은 “주최 측에서 공연 전 안전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안전점검은 사전에 경찰서와 소방서, 지자체 담당 공무원이 참여해 공연이 열리기 전에 모든 사고 가능성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이다. 월드DJ페스티벌 기획자인 류재현 감독은 “대통령 행사도 사전에 안전 점검을 하듯, 현장 안전점검은 가장 중요한 문제”라며 “관객들은 통상 높은 곳에서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공연장 일대 높은 곳은 늘 점검을 한다”고 설명했다. 사고대책본부 관계자는 “사고가 난 곳은 공연장 외 지역”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공연장으로 규정된 광장 바깥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관계자는 “공연 주관사인 이데일리 측에서 경찰과 소방 협조만 얘기해 왔고 따로 현장 안전점검은 없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주최 측인 경기과학기술진흥원 관계자도 “행사의 실질적인 주관 기관인 이데일리TV의 국장이 행사 하루 전인 16일 경찰에서 안전교육만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축제 기획은 플랜박스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이데일리 측에서 외주를 줬다고 했다. 하지만 공연 기획자가 꼼꼼하게 안전점검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플랜박스 양지열 대표는 “나는 당시 현장에 없었다. 사전 안전점검 여부도 모른다. 어떤 얘기도 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었다. 한 공연 기획자는 “주최 측이 돈을 아끼기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축제를 기획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경호원을 쓸 경우 하루에 15만원가량이 든다. 이번 축제에 배치된 경호원 수가 4~5명임을 감안하면 60만~75만원 정도 든 셈이다. 업계에선 인기 있는 연예인을 섭외할 경우 팀당 1000만원 선에서 가격을 지불한다고 한다. 행사 주관사인 이데일리·이데일리TV 측은 이번 축제 예산으로 2억원을 책정했다.

행사의 주최가 공동이냐, 아니냐를 놓고도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 행사 관련 포스터엔 경기도·경기과학기술진흥원 주최, 이데일리·이데일리TV 주관이라고 써 있다. 사고 현장 한쪽에 놓여 있던 작은 광고판에는 ‘제1회 판교테크노밸리 축제’와 ‘이데일리, 이데일리TV’만이 적혀 있었다. 18일 오전 성남시 사고대책본부 김남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이번 행사는 이데일리가 2억원을 내서 사업을 추진하고 주관한 행사다. 경기도와 성남시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의 묵인하에 명의를 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데일리는 “이 일대에서 기존에 치러지던 작은 공연들을 경기도와 진흥원, 성남시, 이데일리가 축제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며 “명칭을 도용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삼남매 남겨 놓고 참변 당한 부부도
이번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6명으로 집계됐다. 부상자는 11명이다. 대부분이 30~40대로 인근 직장인이거나 식당가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사망자 가운데 정연태(47)·권복녀(46)씨 부부는 초등학생 늦둥이를 포함해 삼남매를 남겨 두고 참변을 당했다. 정씨는 판교 IT업체에서 건물을 관리하며 다음달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장례식장을 찾은 친구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부부였는데, 쉬는 날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사고를 당한 것 같다”고 했다.

아내와 아들 둘을 중국에 유학 보낸 한 남성도 변을 당했다. ‘기러기 아빠’이던 그는 일주일에 몇 번씩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할 정도로 가족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졌다. 한 지인은 “내년 2월께 가족들과 같이 살기 위해 몇 달 전 전셋집까지 얻어두고 이런 참변을 당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인근 영어학원에서 일하던 강희선(24)씨도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 강씨는 퇴근길에 포미닛의 공연 사진 3장을 찍어 남자친구에게 보낸 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엄마와 둘이 살던 강씨는, 퇴근하면 늘 엄마와 함께 산책을 다니며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던 딸이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지난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를 지극히 보살피던 착한 딸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행사 기획과 안전을 담당했다가 경찰 조사를 받고 18일 투신자살한 경기과기원 직원 오모(37)씨는 SNS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사고로 죽은 이들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진정성은 알아주셨으면 한다. 가족들에게 죄송하다”고 글을 남겼다.

유재연 기자·강승한 인턴기자 que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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