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하되 포기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북한당국은 우리가 걱정했던 대로 l·22 「통일헌법」 제의를 거부하여 실로 오랜만에 되살아나는가 싶던 민족화합의 징후를 짓밟아 버렸다.
결국 북한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왕조」의 보존만을 지상명령으로 삼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염원은 염두에도 없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천명한 셈이다.
북한 부주석 김일의 이름으로 된 「통일헌법」 거부성명이 1·22 제의를 『현실을 외면한 도식』이라고 일축했다는데 이르러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저 허허로운 실소뿐이다.
남과 북은 지난 37년 동안의 분단상태에서 서로 다른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쌍방의 불신과 적대상태의 해소를 위한 현실적인 조치 없이 단숨에 통일을 성취하는 길은 무력통일 밖에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1·22 제의의 「잠정협정」 7개항을 「현실을 외면한 도식」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무력통일 논자들의 주문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김일의 성명에는 북한의 거부속셈이 무엇인가를 보충 설명하는 귀절이 들어있다. 북한은 통일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반공정책 포기, 한국정부의 「사죄」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그런 요구는 한국더러 북한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여 북한의 일방적인 공산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거나 다름없다.
북한이 통일에 이르는 남북대화, 교류, 민족화합에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는바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인 바탕은 폭력혁명 노선과 거기서 파생되는 남북 대치상태다.
남북대화와 교류로 인하여 북한사회의 일부 계층이라도 「한국바람」을 쐬게되면 「김일성 왕조」의 바탕이 흔들리는 것을 북한당국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북한의 지도층은 아직도 「스탈린」사후의 소련과 모택동 사후의 중공의 교훈을 짐짓 외면하고 있다. 김일성의 사후 몇 년 몇 달을 지탱할지 모르는 「세습왕조」의 모래성을 쌓기 위해서 한국인 모두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여론의 기대에 주먹질을 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는 처사일 뿐이다.
지금 동서관계는 미소대립을 주축으로 하여 긴장을 더해가고 있다. 이런 국제환경 속에서 남북한이 적대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면 자주·평화통일의 전망은 멀어지고 군비경쟁의 중압만 늘어날게 분명한 일이다.
북한은 75년 외환위기이래 심각한 경제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폴란드 사태가 증명하듯이 소련과 중공을 포함한 공산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허덕이고 있어 다투어 구미일 쪽의 자본과 기술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홀로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언제까지 허장성세로 큰 기운에 역행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북한의 거부반응에 일단 실망은 했으되 포기하지 않는다. 자연은 진공상태를 오래 용납하지 않는 법, 우리 쪽의 준비가 착실히 쌓이면 민족화합의 기운은 「낮은 데」로 흘러가게 마련이니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