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5)제76화 화맥인맥(34)월전 장우성|45년 10월 갓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주관|연합군 환영도 겸해 덕수궁에서 열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해방이 되자 나는 그해 10월에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안암동에 자리를 잡고 동정을 살폈다. 종로 화신 맞은편 장안빌딩에는 중앙문화협의회 산하의 조선미술 건설본부 간판이 걸리고 미술인들이 이곳에 몰려 들었다. 이때의 임원둘은 고희동 이종우 김주경 오지호 김용준 길진섭 정현웅(서기장) 변관식 배렴 장우성 이쾌대 김만형 최재덕 김환기 이인성씨 등이다.
조선미술 건설본부는 이당 (김은호) 청전(이상범) 운보(김기창) 김인승 윤효중씨를 조전시대 심사위원·추천작가가 되었다는 이유로 제명했다.
나는 가끔 장안빌딩에 나가 미술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는 장안빌딩에 있는데 인천에서부터 미군이 진주한다고 구경꾼들이 운집했다.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다보았다. 대단할 걸로 알았는데 카키복을 입고 카빈을 멘 키가 훤칠한 군인들이 철모를 쓰고 4열 종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맨앞에는 포장을 씌운 지프가 선도를 섰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항진이란 게 흐느적흐느적 터덜터덜 걷는 것이었다.
나는 저 사람들이 어떻게 그 독한 일본군과 싸워 이겼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번은 종각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기에 웬일인가 싶어 가보았더니 나무 그늘에 총을 든 일본군 1백여명이 앉아 있었다.
한참후 지프를 타고 미군 4∼5명이 오더니 차에서 내려 일본군을 데리고 갔다. 말 한마디 못하고 수굿수굿 따라가는 꼴이 마치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듯했다.
이런 중에서 문화인들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여성이란 사람이 인민당을 만들어 화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서양화가 이쾌대의 실형일 뿐 아니라 자신도 풍속적인 그림을 잘 그리던 터였다. 민속학에도 밝아 민속 의상에 관한 책도 내고 글도 썼다.
45년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덕수궁에서는 조선미술 건설본부가 주관, 연합군을 환영하는 「해방기념 미술전」이 열렸다.
이때 이인성이 포스터를 그렸는데 문안을 「모든 권리는 인민에게」라고 잡아 말썽이 되었다.
이일 때문에 미술 인들이 롯데호텔 옆에 있던 옛 중앙도서관 지하실에 여러 차례 모여서 희망을 가졌다.
어떤 사람은 『이게 뭐냐. 빨갱이가 하는 이야기다) 된다, 안 된다, 뭐가 나쁘냐로 공방전을 벌였다.
특히 춘곡(고희동)과 심산(노수현)이 좌경된 어휘라고 완강히 거부하고 젊은 서양화가 몇 사람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진통을 겪으면서도 해방 기념전은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해방 기념전에는 오지호 이건영 김용준 장우성 배렴 박득순 이종우 김만형 이쾌대 최재덕 노수현 정홍거 이인성 김재석 윤자선 김주경 이마동 씨 등 많은 동·서양화가가 참여했다.
해방 기념전을 마치고 12월에 중앙 고보에서 미술인 총회를 열어 「조선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이때 춘곡이 회장에 뽑혔다.
「조선미협」 창립직후에 일제시대 최초로 2인 화집을 내 화제가 되었던 오지호 김주경과 박영선이 떨어져 나와 별도로 「미술동맹」을 결성했다.
조선미협 회장 고희동이 정치성을 띤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회원 30여명(주로 서양화가)이 이탈, 「조형미술동맹」 (위원장 윤희정)을 조직했다.
이 조형미술동맹이 또 분열, 「미술문화협회」로 나누어졌다.
미술문화협회는 위원장에 이쾌대, 사무장은 이봉상이 맡았다.
동양화단에서도 청강(김영기) 현초(이유태) 현소(정홍거) 운당 (조용승)과 내가 추동, 「단구미술원」을 만들었다. 해방이 되어 문화계가 모두 들썩들썩하는 판에 유독 동양화단만 침체되어 있어 새로운 연구도 하고 전시회도 열 양으로 연구 친목단체를 만든 것이다.
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숙명여고에서 미술가 총회를 열고 「대한미협」을 발촉시켰다. 이때의 임원은 고희동 이종우 배염 노수현 장우성 박득순 장발 이마동 임학선 임용련 이응로 도상봉 이유태 이상범씨 등이다.
청전은 회원 사퇴선언을 하고 재야로 물러났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