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폭등 … 저금리 딜레마] '금리인하 → 경기부양' 왜 안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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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인하가 소비 진작과 경기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란 한국은행의 기대가 들어맞지 않는 것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가계와 기업이 처한 여건과 행동양식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가계 부문에선 안정적인 근로소득자의 비율이 크게 줄어든 대신 명예퇴직 등으로 금융소득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저금리로 이자 부담이 줄어 지출이 늘어나는 대체효과보다는 금융소득 감소를 걱정해 소비를 줄이는 소득효과가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연구원은 "저축이나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금리 인하로 생긴 소득 감소를 지출 축소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며 "소비를 늘려 이를 상쇄해 줘야 할 근로소득자는 비정규직이 절반 이상으로 늘어나 당장의 이자부담 감소를 소비 확대로 연결시킬 수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3분의 1로 떨어진 금리 수준도 가계 소비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국어대 임기영(경제학) 교수는 "금리가 10%에서 9%로 떨어지는 것과 5%에서 4%로 떨어지는 것은 체감 정도가 다르다. 절대 금리가 낮은 상황에서 금리 인하가 계속돼 금융소득계층의 소비가 더욱 위축됐다"고 말했다. 결국 저금리로 타격을 받는 계층의 소비는 곧바로 줄어드는 데 비해 소비 여력이 생긴 계층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출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부문에서도 저금리의 효과는 왜곡되고 있다. 대기업은 외환위기 뒤 구조조정을 통해 차입경영을 자제하고 선진국을 능가하는 수준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췄다. 지난해 제조업체들의 현금보유액은 66조원에 달했다. 마땅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해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대기업들에 금리가 낮으니 투자를 더 하라는 얘기가 통할 리 없다.

돈을 빌려쓰는 경우가 대부분인 중소기업엔 저금리에 따른 이자 부담 경감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투자 확대를 유발할 정도는 되지 못하고 있다. 원자재값 상승과 내수부진 등 더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용보증기금이 지난달 31일 중소제조업체 1700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복수응답)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자금난(30.2%)을 꼽은 비율은 원자재값 상승(59.2%)과 내수부진(42.7%)에 이어 셋째였다. 이 비율은 한은이 금리를 떨어뜨린 지난해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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