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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드라마 '북핵 위기 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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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노무현 한국 대통령,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주연 배우로 등장하는 한반도 핵 사태에 영화 제목을 붙인다면 '북한 핵 위기 II'가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이미 11년 전에 '북한 핵 위기 I'이란 한편의 위기극을 감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핵 I편이 A급 드라마였다면 현재 진행 중인 북핵 II편은 B급 이상의 평가를 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전편만 한 속편이 없다'는 것이 영화계의 속설이긴 하지만 이번 속편은 그냥 봐넘기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북핵 II 드라마는 기획 및 시나리오.연출.대사 전달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개선할 점이 있다.

첫째, 명확한 기획 의도와 탄탄한 시나리오는 성공적인 영화의 1차 조건이다. 북핵 I편이 성공했던 것도 기획자였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분명한 의도와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주고받기식 북.미 협상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을 동결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북.미 양국은 16개월간에 걸친 양자회담을 통해 핵 위기를 해피 엔딩으로 이끌 수 있었다. 반면 북핵 II 드라마의 최대 문제점은 기획 의도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북핵 2차 위기가 불거진 지 34개월이 지났건만 우리는 아직도 워싱턴의 분명한 의도를 모르고 있다. 목표가 뭔가. 북한의 정권 교체인가, 핵 개발 폐기인가, 북한을 빌미로 한 미사일방어망(MD) 개발인가.

시나리오는 단순 명쾌할수록 좋은 법인데 6자회담은 너무 복잡하다. 예컨대 회담을 한 번 열려면 각국 대표단 외에 통역만도 48명이 필요하다.

둘째, 메가폰을 잡은 부시 감독의 연출 스타일도 문제다. 일단 시나리오가 정해졌으면 역할에 걸맞은 배우를 캐스팅해 연기를 맡기는 것이 상식이다. 북핵 I이 성공했던 것도 클린턴 감독이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백악관은 협상 과정에 지나치게 세세하게 간섭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베이징에서 열린 3차 6자회담에서 미국 수석대표였던 제임스 켈리 전 동아태 차관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북한 대표 앞에서 백악관의 훈령을 자구 하나 틀리지 않게 읽어내려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셋째, 배우의 대사 전달력이 부족하고 호흡이 잘 안 맞는다. 클린턴은 94년 7월 9일 북.미 제네바회담 도중 김일성이 사망하자 즉각 애도를 표했고, 갈루치 대표도 북한 대표부를 찾아가 조문했다. 이 같은 외교적 제스처가 북.미 협상 분위기를 호전시켰음은 물론이다. 반면 지난 4월 29일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을 '폭군'이라고 부르면서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한 것은 대표적인 대사 전달 실패 사례다. 또 백악관.국무부.국방부 간에 손발도 맞지 않는다. 예컨대 부시 대통령은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는 와중에 펜타곤이 F-117 스텔스기를 한국에 배치했다. '핵 실험 같은 불장난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미제의 침략'에 대비해 온 평양에서는 미국의 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제의 공격이 임박했다. 따라서 핵 개발을 더욱 서두르자'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희망적인 것은 미국의 연기력이 다소 나아졌다는 점이다. 부시 대통령이 최근 김정일을 '미스터 김정일'이라고 호칭한 것이나 지난해까지 지겹게 듣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에 대한 언급이 뜸해진 게 그 예다. 11일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핵 드라마가 명작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해본다.

최원기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