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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성「재생불량 성 빈혈」앓던 소년|9년만에 목사 되어 돌아와|72년 본지 통해 알려져…1년 뒤 각계 온정으로 도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선생님! 10년 전 선생님의 뜨거운 피를 받았던 수원의 이상기 입니다. 이렇게 완쾌되어 살아 돌아왔습니다.』『뭐라고! 이 사람아,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는데….』
10년 전 꺼져 가는 젊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팔을 걷고 피를 뽑았던 노 교장과 그 피로 난치병을 이겨 30대의 어엿한 젊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돌아온 이상기씨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감격에 떨었다.
수원의 이상기군(당시 19세)-.
어린 나이로 재생불량 성 빈혈증이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응시하던 이 군은 10년만에 이군 아닌 이목사가 되어 귀국, 아직도 그 몸에 들고 있는 수혈의 은인 옛 모교의 조준묵 교장(58·현 부평동중 교장)을 곧바로 찾아 보은의 인사를 올린 것이다.
『선생님께서 그 때 헌혈을 하시고는 쓰러져 명석에 누우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죄스럽습니다.』
『아니 야. 내 피가 자네 몸에 돌며 자네를 살렸다는 게 꿈만 같네. 소식이 끊겨 나는 불길한 생각까지 했었는데….』스승과 제자는 떨어질 줄 몰랐다.
이 군의 의연했던 투병생활과 어려운 가정형편이 중앙일보에 처음 소개된 것은 72년 2월15일.
이를 계기로 각계의 온정과 격려를 받았던 이 군은 73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뒷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결혼도 하여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이 목사는 귀국즉시 중앙일보사를 찾았다. 『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인정을 베풀어주신 중앙일보독자 여러분들께 이렇게 건강을 되찾았고 목사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이씨의 표정은 진지했다.
10년 전 이 군이 앓던 재생불량 성 빈혈증은 1백만 명에 1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한 난치병. 이 군의 경우 하루 6.5g씩의 피가 매일같이 죽어 가면서 체내에서는 전혀 새 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피하출혈까지 겹쳐 1주일에 한번씩은 꼭 남의 피를 수혈해야만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 군의 가정형편은 당시 1회 수혈 비 5천 원을 꼬박 꼬박 댈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조금 씩 조금씩 졸아드는 자신의 혈액을 느끼면서 이 군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군의 애절한 사연은 주치의였던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채응석·한지숙 박사에 의해 중앙일보에 알려졌고 중앙일보는 이 군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꺼져 가는 한 젊은 생명을 끝까지 살리자는 각계의 온정이 밀려들었다.
5·16장학회 장학생이었던 이군을 돕기 위해 5·16장학회(당시 이사장 김현철)는 긴급이사회를 소집했고, 고 박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거액의 치료비와 함께 6차례의 격려친필을 보냈다.
모교인 수원 수성고를 비롯, 인창 중-고 등 남녀고교생들이 헌혈에 앞장섰고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돼지저금통을 털어 성금을 보내 왔다.
사람의 손길로 1년간 치료를 받던 이 군은 73년 11월 십자군선교회의 주선으로 미국 데이비드리빙스턴 선교재단(오클라호마주 털사시 소재)의「페디크」회장에게 소개되어 도미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군은 75년 12월까지 로스앤젤레스 UCLA 의과대학「니컬러스·코스티아」박사의 전담치료를 받았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저의 제2의 생명이 탄생하는 날 이었습니다. 「니컬러스」박사께서 정밀진단을 하더니 당신은 일을 해도 좋고, 공부를 해도 되고, 부부생활을 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그때만 해도 이 병은 거의 죽는 것으로 알았던 이 군은 너무 기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동갑인 부인 정명숙씨(30)와는 75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수원 한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사귀어 온 소꿉친구.
부인을 미국으로 초청하는데는 주치의「니컬러스」박사가 로스앤젤레스 시「브래들리」시장에게 특별히 간청, 「브래들리」시장은 다시 주한 미 대사「하비브」씨에게 연락, 모든 서류를 갖추어 주었다.
퇴원 후 1년간을 교외에서 청소부·교인수송 운전사노릇을 하던 이 군은 76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목사가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80년 10월 목사가 됐습니다. 소명확인을 위해 보름씩 두 번, 그리고 최고 40일의 금식기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제몸 엔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혈색수치도 정상인과 같이 계속 15g이었습니다.』이 목사는 비로소 완치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두 딸 진희(6)·「에스터」(4)와 4식구가 방 둘인 19평 짜리 아파트(로스앤젤레스 맨하턴 플레이스632) 에 살고 있다는 이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의 평강 교회 담임목사로 월 수 1천2백 달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제가 사랑을 나누어 줄 차례입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마음 아픈 사람 모두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사랑을 드려야겠습니다.』이 목사는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했다.
『영주권 신청을 위한 비자인터뷰가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동안 온정을 베풀어주신 분들을 찾아 머리 숙여 큰절을 올리렵니다.』75kg의 건장한 30대 젊은 목사는 고통과 절망에 몸부림쳤던 옛날의 눈빛에서 자신과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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