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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어느 여당 의원의 '빼딱메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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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한때 국회의원들은 왜 저 소리를 입에 달고 있을까 궁금한 적이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발언을 시작할 때 대부분 이런 식이어서죠.

 “존경하는 정의화 국회의장님, 동료 의원 여러분, 저는 무슨 지역구 ○○○의원입니다….”

 “존경하는 ○○○의원님께서….”

 그렇게 의원들은 상투적으로 ‘존경하는’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러곤 싸웁니다. “존경하는 ○○○님께서…”란 말을 구령처럼 하고 난 뒤 “당신 말은 엉터리야”라고 말이죠. 큰절하고 치고받는 격입니다. 그러니 ‘존경하는’이란 단어를 남발한다고, 진짜로 존경하는 줄 믿는 사람은 당사자들 포함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요즘 들어 새삼 ‘그러면 그렇지, 존경은 무슨…’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난 7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 군 장성 출신 여당 의원과 검사 출신 또 다른 여당 의원이 486운동권 출신 야당 의원의 질의 도중 메모지에 필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습니다. 존경은커녕 메모지에 적은 내용이 압권이었습니다.

 ‘쟤는 뭐든지 빼딱! 이상하게 저기 애들은 다 그래요!’ 뒷면엔 이런 단어들이 적혔습니다.

 ‘한명숙이 추천, 운동권, 좌파적’.

  빠듯한 국감 일정에 저런 뒷담화 나눌 시간이 있었을지는 차치하고 내용은 맞나요?

 삐딱도 아니고 빼딱. 뭐, 그렇게 볼 법도 합니다. 그러나 야당 의원은 원래 빼딱해야 합니다. 국정을 감사하는 자리인데 순한 양 같을 이유는 없습니다.

 운동권+좌파적. 그것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새로운 걸 발견한 것처럼, 입봉 때까지 거슬러 가며 쑥덕일 일인가요. 좌파란 단어를 종북이란 말과 동의어로 쓴 건 아니길 바랍니다.

 이상하게 쟤들은 다 그래. 이건 뭡니까.

 부스러기 같은 메모 쪽지일 수 있지만 ‘위험한 메모’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첫째, 진영논리가 배어 있습니다.

 메모 어느 구석에도 상생과 공명(共鳴)의 숨결을 엿볼 수 없습니다. 파트너십에 대한 인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말 ‘이상한 야당’이 망하기라도 하면 여당 혼자 잘할 수 있나요? 이 없으면 잇몸이 시리지 않을까요? 팝콘이 있어야 영화가 더 즐겁지 않습니까?

 둘째, 소원할 대로 소원한 여야가 보입니다.

 조금 먼 얘기지만 1980년대 김윤환(여당)-김원기(야당) 원내총무 라인은 어려운 문제도 잘 버무리고 반죽해 이젠 국회의 전설처럼 됐습니다. 87년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2년을 마치고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공약하고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고 출범한 거죠. 이걸 야당은 유보해 주고 여당은 5공 청산작업을 약속했습니다. 역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빅딜을 두 사람은 소주잔을 기울여 가며 해냈다고 합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메모는 여야 관계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어떤 국회 상임위원회는 4년 내내 여야 의원들끼리 밥 한 번 같이 안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답이라도 좋으니 국회에서 답이 좀 나왔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셋째, 유머 대신 막말, 조롱이 자리 잡은 의회문화를 드러냈습니다. 한국 정치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게 유머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적으로 싫어하면 막말이나 “쟤는 뭐든 빼딱해”라는 식의 조롱밖에 할 게 없을 겁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어떻게 비판하던가요. 백악관 기자들 앞에서 그는 푸틴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걸 두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푸틴이 노벨상 후보? 음, 요즘엔 아무에게나 주긴 하지.”

  오바마 자신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걸 생각하니 느낌이 달라지더군요. 우리 국회에서 유머 있는 비판을 구경하기란 결혼식장에서 ‘짧고 재밌는 주례사’를 만나기보다 어렵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빼딱메모’, 유감입니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