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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시장 특수성 외면한 '과징금 부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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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달 2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시내전화 요금을 담합했다는 혐의로 KT와 하나로텔레콤에 각각 1130억원과 21억5000만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필자는 이번 공정위 조치가 통신 전문가들이 제시하고 있는 정책평가 기준인 능률성.효과성.필요성 가운데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 아마추어적인 규제정책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선진국들은 1개 사업자가 전국을 장악하는 독점체제의 통신사업을 경쟁 체제로 바꾸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AT&T는 국제전화와 장거리전화 사업에서 MCI 등 새로운 사업자와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BELL이 독점해 오던 시내전화 역시 여러 지역의 독립된 회사로 분할됐다.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통신요금은 인하됐고, 통신기술 개발은 물론 사업자 간 서비스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오늘날 지식정보사회의 IT 기반이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구축됐다.

우리나라도 이런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다. 지난 100년 이상 정부가 독점해 오던 통신사업이 KT 민영화를 계기로 민간으로 이관됐고, 90년대 초 국제전화 사업의 경쟁을 시발로 시외전화.무선이동통신 사업에도 경쟁이 잇따라 도입됐다. 마지막으로 97년 제2 시내전화 사업자인 하나로통신(현 하나로텔레콤)이 설립됨으로써 국내 통신시장도 외형적으로는 완전한 경쟁체제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배적 사업자와 제2사업자의 시장점유율이 최소한 80% 대 20%는 돼야 제대로 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도 시내전화 시장점유율을 보면 KT가 93.8%, 하나로텔레콤이 6.2%로 여전히 KT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하나로텔레콤이 가입자 유치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해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통신사업의 특성상 시장지배적 사업자인 KT와 협조하지 않고서는 영업할 수 없는 통신시장만의 독특한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로텔레콤 가입자가 KT 가입자와 통화하기 위해서는 KT 전화국에 하나로텔레콤 가입자를 위한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 또 KT 가입자가 하나로텔레콤으로 가입을 변경하면서 기존 전화번호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KT가 특별한 시설을 설치해줘야만 한다. 이런 문제는 시장의 원론적인 논리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상기 이유들로 인해 통신사업의 경우 특수한 상황임을 감안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게 하는 이른바 '경쟁적 규제정책'이 필수불가피한 것이다. 방송.통신.항공 등 공사(公私) 구분이 어려운 소위 제3섹터적 성질의 사업분야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경쟁적 규제정책을 펴고 있다.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후발 사업자를 지원.육성해 유효경쟁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번에 요금 담합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도 결국 이런 유효경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와 사업자 간의 일련의 협조와 조정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공정위도 나름의 입장이 있겠지만 통신시장의 이런 구조적 문제를 감안했다면 이번 과징금 부과에 좀 더 신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동안 탈규제의 분위기 속에서 정보통신부는 유선통신 분야에서는 그동안 직무유기에 가까울 만큼 효율성 있는 유효경쟁 정책을 펼쳐오지 못했다. 그 결과 막대한 출연금을 내고 사업을 수행해 온 온세통신과 두루넷이 시장에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2위 사업자인 하나로텔레콤마저 또다시 위기에 빠진다면 통신시장은 다시 KT의 독점체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유효경쟁은 기업을 위해서라기보다 소비자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통신요금이 얼마나 인하됐으며, 국민이 누리고 있는 통신서비스가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여기서 누누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통신업계의 문제는 우선 통신위원회에 맡겨두고 그 다음에 공정위가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통신위는 통신위대로, 공정위는 공정위대로 이중 제재의 칼을 들이댄다면 결국 통신시장은 힘 있고 자금이 풍부한 시장지배적 사업자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게 통신업계 전문가들의 판단이자 우려다.

신윤식 하나로드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