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구원」은 「인간회복」에서|구원 찾는 과정만 그린 작품많아|종교는 내세적‥‥영혼구제가 목표|문학과 종교도 새로운관계 모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종교적 구원(구원)과 문학적구원은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치점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까다로운 문제에 대한 소설가로서의 입장을 밝히는 강연이 9일하오7시 서울YWCA 수요강좌에서 있었다.
최근 『낮은곳에 임하소서』란 제목의 소설을 써내어 관심을 모은 소설가 이청준씨는 사견(사견)임을 전제한 이날 강연의 결론으로서 종교적 구윈과 문학적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창조적 결단이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문학이나 종교나 궁극적목표로하는 것은 인간의 총체적구원이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풀어갔다.
종교는 내세적 구원과 영혼의 구제를 목표로 하고 있고 문학은 현세적이고 육신적(정신·감정포함)구원이 목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적구원은 보통 신의 섭리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에 의해 삶과 죽음이 있는 유한성의 세계에 왔다. 이러한 조건속에서 인간은 매순간이 생의 종말의 위험을 느끼고 살아가면서 신을 증거해야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신의 섭리를 증거하는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것을 먼저 찾아 행한다는 것일수 있다면 그러한 일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한 창조적결단에 맡겨질수밖에 없다.
이씨는 문학에 있어서의 구원은 인간이 인간다운데서 떨어져나와 인간답지 못하게된것, 본질적인 것에서 비본질적인 것으로된「소외」를 벗어나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씨는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제도·폭력등을 「우상」으로 보고 이 우상을 깨는데서 구원이 찾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이 가장 본질적인 삶이라는 것을 알지못하고 있다. 인간은 무엇이 본질이냐를 찾으려 노력해야하며 문학에서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문학에서의 구원이 본질을 찾으면서 끊임없이 삶의 순간순간을 반성하고 그 순간에서 가장 선한것을 찾으려는 노력과 일치하며 그것은 결국 창조적 결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씨는 문학에서 구원이 이야기된것은 중세기사도문학이 시초라고 보았다. 순례를 감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이야기로 꾸몄고 신의 정의가 지배한다는 종교적 구원을 담았다는것.
르네상스시기에 이르면서 인간성과 자연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중세적 기독교의 세계가 부정되면서 종교와 문학은 거리를 갖게됐고 19세기 사실주의문학은 이거리를 더욱 넓혔다. 과학적 분석정신이 팽배하면서 기독교적 선악관은 부정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오히려 과학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고 문학이 과학정신에만 의존하여 인간구원을 이룰수 있느냐는 회의에 빠져 종교와 문학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문학작품에서 구원을 어떻게 수용하느냐를 말한 이씨는 문학작품이 구원을 찾아가다가 이루지 못하는 과정만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유형이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그렇게되는 이유를 작가가 자기의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구원을 찾으려는 노력만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문학적 감동을 더 줄수 있고 또 오늘과 같이 선악의 구별이 명확하지않은 시대에 작가들이 선악을 결정지어줄 능력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재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