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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미술관장도 멍할 때 많다지요 난해한 현대미술 친절 가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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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데이미언 허스트의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불가능한 물리적인 죽음’(1991). 4.3m 길이의 타이거 상어를 유리 상자에 넣었다. [사진 RHK]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지음
김세진 옮김, RHK
560쪽, 2만5000원

1972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는 미국 미니멀리즘 작가 칼 안드레(79)의 조각 ‘등가Ⅷ’을 구입했다. 120개 벽돌을 작가의 지시에 따라 두 층으로 쌓아올린 직육면체형 작품인데 가격이 상당했다. 언론이 나서서 질타했다. “벽돌 무더기를 사느라 나랏돈을 낭비하다니!”(10쪽)

 30년 뒤 이 미술관은 더 기괴한 작품을 사들였다. 슬로바키아 출신 로만 온다크가 자기가 써 놓은 지침에 따라 배우들을 고용해 전시장 안팎에 줄을 서게 한 퍼포먼스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다. 누구도 나서서 소리높여 비판하지 않았다. 그 사이 현대미술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 수십 년간 막대한 자금이 예술계로 흘러들었다. 정부는 박물관의 신축과 단장에 돈을 쏟아부었고, 특급 부호들은 예술품을 안전한 투자 대상으로 삼았다. 억만장자가 된 예술가들은 영화배우처럼 온갖 것을 누리게 됐다. 이와 함께 늘어난 갤러리 관객들은 당대를 얘기하는 건강하고 역동적이며 활기찬 예술을 원했다(1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은 난해하다. 미술관에 찾아 갔건만 당최 뭘 봤는지 알 수가 없다 싶은 관객도 많을 것이다.

중국 화가 아이웨이웨이의 ‘한나라 왕조의 자기를 떨어뜨리기’(1995).

 이 책 또한 이같은 물음표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원제는 ‘뭘 보고 있니?(What are you looking at?)’. 런던 테이트 갤러리 관장을 역임하고 현대 BBC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저자는 생경한 현대미술품과 마주쳤을 때 난감한 표정을 짓는 관객들을 숱하게 목격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직접 제작한 현대미술 관련 코미디쇼를 내놓기도 했던 그는 “테이트 갤러리 총관장 니콜라스 세로타 경 또한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가 많다네. 기가 죽기도 하고’라고 털어놓았다”며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책은 뒤샹이 1917년 4월 2일 뉴욕의 가게에서 남성용 소변기를 무심히 골라 ‘R.MUTT’라고 서명한 뒤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공모전에 내놓으며 ‘무엇이 과연 예술인가’ 질문을 던졌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 거리로 뛰어나가 필부필부들의 생활을 화폭에 담은 인상파 화가들을 거쳐, 평면을 재조립한 입체파 등 현대 미술의 주요 국면을 훑어나간 뒤 마지막으로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자신을 브랜드로 만든 오늘날 미술계의 스타들에 이른다.

 ‘그림 가이드’를 자처하는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서도 이 책의 미덕을 꼽자면 실감나는 전달이다. 현대미술의 명장면을 당시의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 재현하며 왜 이 작품이 의미있는지를 보여준다. 영국의 현역 노화가 데이비드 호크니(77)의 입을 빌어 폴 세잔(“세잔은 처음으로 두 눈을 써서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등 과거와 현재의 연결도 시도한다. 명작이 주는 감동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저자의 고심이 묻어난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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