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메뚜기떼가 망치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짐이 국가"라는 말이 있다. 절대왕정의 절대권력이었던 루이 14세가 프랑스와 자신을 동일시한 말이다. 절대왕정만 그럴까. 민주국가나 민주정부는 어떨까. 국가와 정부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헌법 조문에 대한민국의 정의가 나오고 3권 분립으로 표현된 정부가 나오지만 현실세계의 한국과 한국 정부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실체는 현재의 정부로 표현되며, 현재의 정부는 현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은 현 정부를 맡아 이끌어 가는 일단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 정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런 사람들을 선거로 뽑는 것이다. 일단 뽑히면 임기 동안 그들이 한국이 되고, 한국 정부가 되는 것이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고, 수준에 맞지 않다 하더라도 한국은 그 사람들로 표현된다. 그들만이 국민을 대표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국가의 수준은 대표하는 사람들의 수준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 국민 가운데 최고의 인물들이 뽑힌다면 그 나라의 수준은 평균보다 훨씬 높게 평가될 것이고, 불행히 그 나라 평균 수준도 못 되는 사람들이 대표가 된다면 그 나라는 평균 이하로 비춰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대표로 뽑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표는 그 국민의 평균 이상 수준을 갖게 되며 그런 원리로 인해 민주주의가 좋은 제도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문제가 생긴다. 잘난 사람을 싫어해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을 대표로 뽑는다면 나라는 최악의 정부로 구성되며, 그런 식의 선거를 한두 번 하고 나면 나라는 거덜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 정부를 맡은 사람들의 수준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우리는 평균 이하로 대변되는 불행한 나라인가, 아니면 평균을 뛰어넘는 사람들로 대변되는 행운의 나라인가.

현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행운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평균적인 상식만 가졌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이 정부 안에서는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행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했다.

정책은 어떤가. 자신들의 말 한마디, 편지 한 장이 곧 정부의 정책으로 연결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대통령 자문기구라는 무슨 위원장은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보증서를 남발하고, 정체를 모를 사람이 추진하는 사업을 위해 대통령이 친서를 보냈다. 정부는 법과 절차로 움직여야 한다. 법과 절차 없이 그들 마음대로 도장 찍고 보증을 해주니 '한국 정부'는 지금 도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유전사업이나 행담도 사건은 모두 철도공사와 도로공사라는 공기업을 통해 벌어진 해괴한 일들이다. 선거에 이겼으니 공기업은 자기들 차지라는 생각에서 빚어진 일들이 아닐까. '정부'라는 이름의 공적인 자리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말이 있다. 반달족이라는 야만족이 침입해 문명의 세계를 초토화하고 가듯 공공 재산이나 건물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떠나는 행동을 말한다. 마치 메뚜기떼가 일년 내내 농사지은 농작물을 초토화하고 떠나듯 말이다. 민주주의가 이런 약탈족과 인간 메뚜기떼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문제다. 진보를 하든 보수를 하든 제대로 된 사람이 대표가 되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정부가 기득권 세력을 허문다고 새 사람들을 내세웠지만 과연 그 사람들이 그 영역에서 능력으로, 인격으로 존경받고 있는지는 이 정부 사람들 스스로 더 잘 알 것이다. 권위를 허문다면서 등장시킨 사람들이 나라의 품위만 떨어뜨리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국민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국민이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나라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이 정부는 이미 절반이 지났다. 차라리 학습 기회라도 얻으려면 보다 철저하게 실망하는 것이 나라 장래를 위해서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라는 더 피폐해지고, 더 망가질 수밖에 없다. 절반이 지난 지금이라도 이 정도에서 정권도 정신을 차리고, 국민도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

문창극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