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서울 아시안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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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는 중공스포츠의 대 군단이 물려온다.
중공은 한 고위관리의 개인적인 의견을 빌어 『88년 서울올림픽에 당연히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바있다.
이러한 자세는 그 2년전의 아시안게임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 틀림없다.
지난 9월의 바덴바덴 IOC총회에서나, 또 지난주 뉴넬리 AGF총회에서나 중공은 올림픽과 아시안 개임의 개최권이 한국으로 낙착되는 현실을 전후하여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앉았다.
아시아 최대강국인 중공은 74년 테헤란대회 때 처음으로 국제스포츠 무대에 등장하면서 그때까지「중국」을 대표하던 대만을 축출해 버렸다.
또 78년 방콕대회를 맞아서는 AGF집행위원회를 비롯하여 종목별 아시아경기연맹의 주도권을 휘어잡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공의 전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측이 가장 우려했던 점이지만 86년 아시안게임의 개최지 문제도 사실상 중공의 향배에 크게 달린 것이었다.
결국 적어도 표면적으로 중공이 서울개최를 묵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북한의 농간은 설 땅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AGF총회에서 중공이 서울개최 결점에 박수를 보냄으로써 한국과 중공의 관계는 신기원을 이룩할 채비를 차렸다.
서울 아시안게임은 자칫 「아시아인의 대제전」이란 측면이 퇴색되고 「서울과 북경의 교환」이란 역사적인 장면이 더욱 부각될지도 모른다.
실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41년만에 나타난 세계적 이목을 끄는 사건이 될 것이다.
북한의 참가이상으로 깊고 넓은 뜻을 중공의 방한에 두는 것은 「황해의 해빙」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직접교류는 국가간 전면문호개방의 시그널이 될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서울에 올 중공선수만은 2백명이상, 신문·방송의 보도요원이 1백여명(78년 방콕대회 때 7O명)이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대규모의 교류다.
중공의 한국방문이후엔 반대로 한국의 중공 상륙도 유망해진다.
중공은 71년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효시로 국제스포츠 무대에 등장하여 한국과는 수없이 경기를 가졌다. 그러나 모두 제3국에서였다.
내년과 작년에 중공은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와 세계아이스하키 C풀 선수권대회를 상해에 유치했었다. 그러나 두 대회에 한국이 출전하게 돼있어 중공은 곤경에 처했고 결국은 대회를 반납하고 말았다.
서방세계로 향해 일부 숨통을 트긴 했지만 아직까진 한국과 같이 정치적·이념적 간격을 초월한 개방주의를 추구하지 못함으로써 미수교의 한국을 먼저 불러들이기엔 주저스러웠던 모양이다.
중공 스포츠는 전통적인 일본의 종합우승을 서울에서 깨뜨리겠다는 야심을 실현시킬 공산도 크다.
74년 테헤란(금메달=일본75, 중공 33개)과 78년 방콕 (금메달=일본70, 중공51개)을 거쳐 내년 뉴델리 대회에선 일본에 바짝 육박할 것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아시아정상의 탈환시기를 서울대회로 잡을 만한 것이다. 그리고 중공은 90년의 아시안게임을 북경에 유치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한국의 대규모선수단이 황해를 건너가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군배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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