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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각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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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부부의 인연을 맺어 평생을 같이 즐겁게 산다는 뜻이다. 우리말에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이라는 표현도 있다.

결혼식 주례사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수명이 길어진다고 결혼 50, 60주년을 맞는 부부가 자동으로 늘지는 않는다.

영국의 저명한 사학자 로렌스 스톤은 수명이 길어질수록 이혼이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서양에서 19세기 이전 이혼이 적었던 데는 부부 중 한 명이 먼저 죽었던 탓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혼의 필요성을 느끼기 전에.

물론 종교나 사회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모두 단명하던 시절엔 이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아니다 싶은 결혼을 해도 배우자가 금방 죽어 주기 때문에 굳이 이혼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스톤은 현대의 이혼이 혼인의 해체 수단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요절(夭折) 또는 조사(早死)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설명했다. 현대의 부부들은 이혼법정에서 헤어지지만 옛날엔 장례식장에서 헤어졌다는 얘기다.

실제 그는 1860년과 1960년 영국의 혼인 해체율을 조사한 결과 100년이란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거의 같은 수치를 얻어 냈다. 1860년엔 사망이, 1960년에는 이혼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아이들이 자신의 친부모가 아닌 보호자와 살게 될 확률은 두 시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럼, 결혼에도 식품처럼 유통기한 같은 게 있는 걸까. 하기야 젊은 날의 열정도 언젠간 식게 마련이다. 여기에 수명도 더 길어진다고 생각해 보자. 식어 버린 관계를 더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허구한 날 정나미 떨어지는 얼굴을 보는 것도 큰 고역일 게다. 그래서 장수가 때론 부부에게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이것이 이혼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게 스톤의 가설이다.

주름은 늘어만 가고, 기력도 쇠해지는데 살 날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그런데 배우자마저 꼴 보기 싫다면? 대안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 갈라서서 따로 '백년각로(百年各老)'하든지, 팔자려니 하며 참고 살든지, 아니면 서로 정이 식지 않도록 미리미리 노력하든지. 세 번째가 정답일 텐데 너 나 할 것 없이 평소 엄청나게 공을 들여야 가능한 일인 듯하다.

남윤호 패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