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용 금호아시아나 명예회장 영전에] 진실한 삶의 모습 기억하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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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성용 회장님,

당신께서는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 감추려고 애써왔지만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학문과 예술과 기업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멋진 일생을 보내면서 나라와 세계에 공헌하였음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박 회장님은 예일대 출신의 경제학 박사로서, 미국 케이스대학과 서강대에서 경제학 교수로서 젊은 시절의 정력을 쏟으셨습니다. 박 회장님의 예술에 대한 놀랄 만한 정열과 적극적 지원은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광주 비엔날레, 통영 국제음악제, 예술의 전당, 금호아트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업적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젊은 음악인들에게 값진 기회와 용기를 준 당신의 노력은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기업에는 별로 맞지 않을 듯 보이던 박 회장님께서 오늘의 금호아시아나를 발전시킨 리더십도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곁을 오늘 떠나가시는 박 회장님을 우리는 학자나 예술의 후원자나 기업인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국민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인간으로 오래 가슴 속에 간직할 것입니다. 학자로서 당신은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술의 후원자로 당신은 과시하기를 한사코 피하였습니다. 기업인으로서 당신은 과욕의 포로가 되는 것을 끝까지 경계하였습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는 인간과 사회, 아름다움과 참됨을 창조하고 아끼는 인간과 사회를 만드는 데 조용히 앞장서는 박 회장님의 자세는 진정 우리 시대의 국민적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떠난 너무나 큰 빈 자리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 지 우리들은 슬픔과 허탈감에 싸여있는 것입니다.

근 50년 전 박형과 제가 예일대학원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녁마다 박형의 조그만 하이파이로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듣던 그 시절로부터 우리와 이별하는 오늘까지 당신은 참으로 진실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다면 우리에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참으로 훌륭한 한국인을 우리는 지금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저 세상으로 가는 먼 길도 박형 특유의 유유한 자세로 편히 가시리라 믿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2005년 5월 27일

이홍구(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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