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김영복 '옥션 단'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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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이란 혹 때에 따라 달라지지만,

명분이냐 실리냐, 고민할 때 중심 잡아주는 경권 시

 마음속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나요.

- 지천 최명길(1586~1647) ‘권(權) : 일에 따라 변하는 것’ 중에서

권도란 혹 어진 사람도 잘못될 수 있지만,

 경도는 사람이 많다 해도 어길 수 없죠.

- 청음 김상헌(1570~1652) ‘경(經) : 변할 수 없는 것’ 중에서

1970년대 말, 서울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에서 일하며 산처럼 쌓여있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난독(亂讀)한 서지 중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 사서(史書) 『연려실기술』이 제일 재미있었다. 인조 시절 병자호란을 기술한 대목에 인용된 이 시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청나라에 대한 항복 문서를 찢었던 사람이 척화파(斥和派)인 청음(淸陰) 김상헌, 그걸 주워서 붙였던 이가 주화파(主和派)인 지천(遲川) 최명길이다. 심양에 끌려가 옥 안에서 두 분이 말씨름 하는 모양새지만 사실은 토론이었다.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게 청음 생각이고, 나라가 싸울 힘이 없어 백성이고 임금이고 다 죽게 생겼는데 척화만 하면 되겠느냐는 게 지천 주장이다. 이 시로 두 분은 마음을 열었다.

 당장 어려울 때는 자식이나 마누라 위해 구걸도 해야 하는데 그걸 20대 때는 몰랐다. 나이 들어가니 세상이 마음만이 아니구나 싶다. 젊어서는 명분을 좇았지만 경권(經權), 즉 불변의 법도와 당대의 요청에 맞추는 지혜를 얻고 싶다. 청음 선생 입장으로만 살아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최명길이란 분이 자꾸 생각난다.  김영복 ‘TV쇼 진품명품’ 감정위원 ‘옥션 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