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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Faber’에게 영감 샘솟게 하는 원초적 창조도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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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22면

반년 동안 두 번이나 독일에 다녀왔다. 40여 일에 걸친 여행기간은 살면서 가장 오래 외국에 체류한 기록이다. 독일의 동북부 베를린에서부터 남부 뮌헨에 걸쳐 여러 도시를 돌았다. 한 나라를 거의 종주한 셈이다. 한 도시에서 여러 날 묵으며 찬찬히 둘러본 방식도 처음이다. 여유로운 시간과 제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편안함이 중요하다. 쫓기듯 다녔던 이전의 여행은 어설픈 기대의 조각난 기억 밖에 남은 게 없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2> 파버카스텔

어슬렁거리며 도시를 걷는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보이고 개성 있는 가게의 쇼 윈도가 눈에 들어온다. 각자의 전문성을 드러내는 진열품들은 도시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보석과 같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매장 앞에 끌리듯 멈춰 섰다.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이다. 세밀한 굴곡의 나무에 금속광채를 더한 만년필은 멋졌다. 글씨를 쓰는 도구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모든 사용자를 창조자로 여기며 ‘제품 진화’
파버카스텔을 모르지 않는다. 8년 전 뉘른베르크의 본사에 직접 들른 적도 있다. 동화에 나올 법한 성(城)에서 파버카스텔이 만들어진다. 여느 공장의 살풍경한 모습을 연상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귀족 작위를 받은 회장과 얘기도 나눴다. 백발의 훤칠한 키, 기품과 격조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노인이었다. 마주한 내내 자신이 만든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필기구 회사의 회장 입에서 물건과 제품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를 쓰고 그리는 일이야 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창조적 행위라 말했다. “파버카스텔은 창조의 영감을 이끌어 줄 뿐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도 파버카스텔로 그리고 썼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대한 창조를 이끈 도구가 자신의 것이란 자부심은 대단했다.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은 현실로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 파버 백작은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대 주주이기도 하다. 사세 확장과 빌딩을 세워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엔 관심이 없다. 필기구 하나로 부를 이룬 백작은 여전히 낡은 고성에서 일한다. 눈에 보이고 정량화된 수치를 확인해야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팝 스타 엘튼 존, 폴 매카트니 같은 이들과 나누는 우정의 깊이 같은 것들이다.

창조의 도구를 만드는 자부심은 끝없는 혁신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만능의 시대에 원초적 아날로그인 필기구가 계속 만들어지고 사용자가 늘어나는 이유다. 도대체 연필에 무엇을 더한단 말인가? 연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사람에겐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창조의 영감을 더하기 위한 시도라면 무엇이든 가능해 진다. 실물을 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표면에 굴곡을 새기고 더 이름다운 색깔을 입히며 더 쥐기 편한 디자인으로 연필은 감각의 대상으로 바뀐다.

파버카스텔의 연필을 소재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펼친다. 창조의 도구가 재료로 바뀌는 자연스런 반전은 기발함으로 가득하다. 연필의 다양한 변신은 실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디지털의 섬뜩함을 외려 깨우쳐준다. 작가는 연필로 생각하고 상상하며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겼다. 만드는 이는 더 나은 아름다움이 가능하단 생각을 연필에 옮겼다.

파버카스텔은 온갖 필기도구와 미술용품 뿐 아니라 여성들의 화장도구인 아이 펜슬도 만든다. 모두 써지고 그려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창조행위는 여전히 흔적으로 확인된다. 파버카스텔은 모든 고객을 잠재적 창조자들이라 여긴다. 만들어낼 작업이 세상의 풍요와 인간의 미래를 이끌어 줄 것이란 믿음은 진심이다. 인간을 향한 애정과 믿음이 더 큰 성과로 바뀔 확신의 노력은 계속된다.

만년필로 쓰고 디지털로 저장하는 시대
파버카스텔의 제품이 점점 늘어난다. 디지털의 편리함에 빠져 필기란 행동을 소홀히 한 이후의 반성이다. 편함이 더 나은 것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자각은 중요하다. 모든 스케줄이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가고 읽는 것을 사진으로 대체해 보았다. 손의 감각이 동원되지 않은 기억은 불충분했다. 만년필의 뚜껑을 열고 잉크를 넣는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손의 감촉까지를 포함한 필기의 과정이 곧 각인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체험을 이야기하자 친구들이 동조했다. 편리하게 많은 양을 기록할 수 있는 디지털의 맹점은 인간의 소외였다. 행위의 과정이 빠진 편리함은 아무리 효율적이라도 온전한 내 것이 되지 못했다. 우선 절충의 방법을 찾아보았다. 만년필로 직접 쓰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저장했다. 같은 기억은 훨씬 입체적 구분으로 명확해졌다. 놀라운 발견이다. 장식용으로 전락했던 만년필을 모두 꺼내 쓰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만년필이 현역으로 돌아온 계기다.

새로운 각오로 쓰게 된 만년필의 복귀행사가 필요하다. 파버카스텔은 나와 같은 사람의 심정을 미리 헤아려 주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잉크를 선보였다. 익숙하게 보던 검정, 청색잉크가 아니다. 향수병 보다 예쁜 용기 디자인에 여섯 가지 색깔로 선택 범위를 넓혔다. 파버카스텔의 잉크병은 그 자체의 존재감으로 과거의 기능을 뒤집었다. 무딘 아저씨들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기품 있고 세련된 잉크 색깔이다. 헤이즐넛 브라운, 노스 그린 칼라를 아시는지. 글씨를 써 보면 상상초월의 일이 벌어진다. 글씨가 기름 발라놓은 것 마냥 윤기 있고 은은한 향마저 풍긴다. 손으로 글씨 쓰는 즐거움이 커진 것은 당연하다. 기존 쓰던 잉크에 더해 세 개의 잉크를 샀다. 여자들이 핸드백 새로 장만했을 때만큼 뿌듯하다.

파버카스텔을 쓴다는 이유로 창조자 반열에 끼워준 파버 백작이 고맙다. 그의 진심만큼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커져만 간다. 디지털의 최종 목적지는 인간의 행동과 부합하는 아날로그와의 결합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묵묵하게 아날로그의 본질을 지켜갔던 인간은 훌륭했다. 사랑의 대상을 하루아침에 차버리는 경박함의 경고는 묵직하고 두텁다.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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