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19) 제 7구단 창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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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84년은 프로야구 6개 구단이 막내동생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출범 당시 OB 베어스는 3년 뒤 연고지를 서울로 옮긴다는 옵션을 갖고 있었다.

OB는 원년 우승을 차지하며 인기구단으로 자리잡았지만 충청 연고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결국 충청 연고로 출범할 신생 구단을 물색해야 했다.

충청 연고의 신생 구단은 82년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동아건설과 한국화약이 양대 후보였다. 그러나 KBO가 찾아가서 창단을 권유했던 초기와는 사정이 달랐다.

3년 동안 프로야구의 인기가 절정으로 치솟아 프로야구 창단을 희망하는 기업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당시에도 동아건설.한국화약 말고도 농심.한일합섬 등이 적극적으로 창단을 희망했다.

동아건설은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할 때 충청권 1후보였던 데다 출범 이후 계열사인 동아생명에서 '파랑새존'으로 잘 알려진 프로야구 스폰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체육담당비서관 쪽에서도 "동아건설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나는 청와대 측에 "충분히 검토해 결정하겠다"라고 말한 뒤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비서실에서 추천한 대한통운의 안사장이라는 분과 접촉했다.KBO 구단주 회의에서도 동아건설이 제시한 창단 조건에 만족을 표시했다.

그런데 쉽게 결론이 나질 않았다. 동아건설 쪽에서 창단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극적이었으나 KBO 총회에서 제시한 '가입금 30억원'부분에서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동아건설의 창단을 유도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지만 가입금 30억원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는 태도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직접 최원석 회장을 만나 교섭을 했다.

나는 "회장님, 지금 프로야구의 인기는 초창기 6개 구단이 각각 연간 10억원 이상의 적자를 봐가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조성한 프로야구 시장에 후발주자로 참여하면서 그냥 들어오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라며 최회장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최회장은 "동아건설이 가입금 30억원을 낸다고 하면 일반 국민에게 명분이 서질 않습니다"라며 가입금을 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내가 다시 "일본이나 미국의 프로야구도 후발 구단들은 가입금을 내고 리그에 참여합니다"라며 안 내는 것이 오히려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최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나는 "동아건설은 창단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이만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한 뒤 최회장 사무실을 나왔다.

나는 이 사실을 서종철 총재에게 보고했다. 이후 충청연고 구단은 한국화약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한국화약에서 제출한 창단신청서 내용에는 가입금 30억원을 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선수확보 방안, 지역 스포츠 기여 계획, 구장확보 등은 물론 88년께에는 흑자구단을 만들어 주식을 공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포함돼 있었다.

결국 KBO는 84년 12월 31일 한국화약그룹.(주)농심.한일합섬 등 세팀의 창단신청서를 접수했고 이듬해 1월 15일 정기총회를 거쳐 1월 16일 한국화약그룹에 충남.북을 연고지로 한 제7구단으로서의 창단을 승인한다고 공식 통보했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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