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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2. 개화파의 列强 인식-<1> 미국 (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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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박노자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팍스 아메리카나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미국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자 수퍼맨의 원형인 '마이티 마우스'가 생각납니다.

1882년부터 1894년까지는 중국의 압제에, 이어 1895년부터 1905년까지는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의 패권 다툼에 시달린 조선 왕조의 위정자들은 미국을 우리의 독립을 지켜줄 '정의의 화신' 마이티 마우스로 보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부당한 간섭에 대한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의 의무, 장차 조선의 사법제도가 미국과 같아질 경우 치외법권 철회, 중.미 관세협정이 5%에 불과했던 데 반해 조.미 수호조약은 10~30%라는 '고율'의 수입 관세를 보장해준 환상 때문이었습니다.

조.미 수호조약이 체결될 무렵인 1882년 조선의 자치와 외교권을 부정한 중국이나 무관세 무역을 계속 강요한 일본에 비해, 미국의 선물은 조선 위정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침략자의 손길에서 약자를 구해주는 마이티 마우스와 같은 미국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 미국은 정의의 수호자로서 약자를 돕는 만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강자의 눈치를 살피며 이익을 좇은 장사꾼에 불과했습니다.

1883년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는 미국 국무부에 올린 보고에서 조선은 정체되고 빈곤한 나라로서 수출 가능한 산물이 별로 없는 단물 빠진 껌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곧 조선공사의 직위를 강등함으로써 조선을 평가 절하했고, 이후 한반도에서 우세한 열강의 편을 들며 자국의 실리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기회주의적인 불간섭 정책을 견지했지요.

조선의 위정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던 거중조정 조항은 애당초 부도난 수표였던 셈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1884년 말 갑신정변으로 인한 청.일 두 나라 사이의 전쟁 위기,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그리고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 발발 전후에 조선 정부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한 거중조정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냉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미국에 대한 구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미공사관의 개설, 미국 공사 연봉의 세배를 주는 미국인 고문에 대한 특별 우대, 운산 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 등 알짜배기 이권의 양여,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포교활동 묵인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짝사랑은 '테프트.가쓰라 각서'를 체결해 필리핀과 조선을 맞바꾼 루스벨트 정부의 배신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한마디로 1883년부터 1905년 사이 전개된 한.미 관계의 대차대조표는 적자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나 한 세기 전 우리의 지성들이 호의적 대미관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미국은 우리의 통상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는 못 된다('중립론(1885)')"고 했고, 조.미조약 체결에 관여한 김윤식(金允植)은 1895년께 "미국 사람은 말만 떠벌리지 행동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으며, 윤치호도 인종 차별, 마약과 범죄의 만연 등 '기독교 국가' 미국의 치부를 꿰뚫고 있었지요.

그런데 개화기 대표적 지성들은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깊이 알게 된 후 애초에 가졌던 호의적인 미국관에 회의를 품었지만, 당시 조선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미국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 실패한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미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간의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한 세기 후 후손들이 우리 시대 한.미 관계의 회계 장부에 어떤 점수를 줄지 유념해야 하겠지요.

반미와 친미의 고정관념을 넘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체계에 어떠한 결함은 없는지, 그리고 한 세기 전 실패로 그친 용미(用美)의 최선책이 무엇인지 좀더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점검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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