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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본 한류의 앞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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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31면

추석 연휴 때 일본을 여행했다. 후쿠오카(福岡)에 갔을 때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기노쿠니야(紀伊国屋)에 들러 다양한 책들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등 서구와는 달리 일본의 대형서점에는 한국 관련 서적이 많이 구비돼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화서적 코너에서 한국 책의 비중은 제법 크다. 한국 TV드라마 등에 관한 책들은 ‘한류’라는 별도의 항목으로 전시돼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한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어학 교재 코너도 이와 유사했다. 몇 년 전에 일본 서점에 들러 어학 교재를 살펴 봤을 때 한국어는 ‘기타 외국어’ 코너에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어’라는 문패를 달고 따로 분류돼 있었다. 서점뿐 아니라 음악과 영상물을 판매하는 상점들도 ‘한류’ 또는 ‘K-Pop’이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공간을 두고 있다. 한국과 인연이 깊은 입장에서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서점에서 한국 관련 책들이 독립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사소한 일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한일 관계를 감안할 때 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대중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한국 문화 붐이 이번만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면서 접한 조선의 도자기에 흠뻑 빠졌다. 소박한 멋을 지닌 조선의 도자기는 일본에서 다도용 그릇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예가들은 규슈(九州)지방을 중심으로 도자기 산업을 크게 부흥시키기도 했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은 19세기 아리타야키(有田燒)와 사츠마야키(薩摩燒)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북미 지역에 많은 수출을 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일본의 문화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는 조선시대의 도자기와 공예품, 민화 등을 일본에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골동품 시장에서는 조선 골동품들을 주로 취급하는 ‘리쵸’(李朝)라는 독립된 시장이 생겨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까지 한국 도자기는 일본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한국 음식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음식 중 하나다. 그 기원은 아마 1988년 서울올림픽 때일 듯 싶다. 당시 한국은 정치적으로 격동기였고 대외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다. 때문에 올림픽을 앞둔 한국으로서는 음식 홍보가 가장 쉬운 마케팅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당시 거품경제로 인해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외국의 독특한 요리를 즐겼다. 올림픽 이후에도 일본인들에게 한국 음식에 대한 좋은 이미지는 유지됐다. 90년대에는 비빔밥이 웰빙 음식으로 자리잡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막걸리 붐이 일었다.

일본에서 한국의 도자기와 음식이 인기를 잃지 않는 비결이 뭘까. 음식은 인간에게 필수품이며 도자기는 그 음식을 예쁘게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선 품격있는 그릇에 담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대접하는 것은 큰 행복이다.

K-Pop 등 한류의 인기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 대중문화는 유행을 타기 때문에 일시적 현상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선 일본에서의 한류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한류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던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도 줄고 있다고 한다. 한류가 시들해진다면 일본 서점의 한류 코너는 사라질 것이다. 한국의 도자기와 음식처럼 일본의 주류 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자리를 확고히 잡을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또 다른 문화상품 개발도 요구된다. 다음번 일본 방문에선 새로운 분야의 한국 관련 책들을 서점에서 만나기를 기대한다.



로버트 파우저 미국 미시간대에서 동양어문학 학사와 언어학 석사를, 아일랜드 트리니티대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다. 일본 교토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후 현재 미국에서 집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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