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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비련의 화가' 이중섭, 그 민낯을 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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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중섭이 1954년 그린 ‘화가의 초상’.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했다. [사진 돌베개]

이중섭 평전
최열 지음
돌베개, 932쪽, 4만8000원

한 인간을 우리가 안다고 말할 때, 그 정도나 밀도는 어느 정도일까. 바꿔 표현하면, 한 사람을 타인이 온전히 파악했다고 진술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평전(評傳)이 전기(傳記)와 다른 지점이 여기일 것이다. 공사(公私) 분별이 꽤 난해한 한국사회에 평전이 드문 이유다.

 최열(58)씨는 미술운동가로 출발해 지난 30여 년 비교적 연고(緣故) 없이 독립 학인(學人)의 길을 걸어온 미술사학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20세기 전반부 한국미술계의 속살을 헤집어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짚어왔다. 그가 김복진·권진규·박수근 등 이 격랑의 시대를 고독하게 걸어간 미술인 평전을 집필하며 내세운 사필(史筆)의 염은 이것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화가라면 왜 예술을 하는지 질문하는 기회가 되기를. 당신이 그림 애호가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묻기를. 만약 당신이 화상(畵商)이라면 무엇을 위해 그림을 파는지 성찰하기 바란다. 당신이 ‘해맑은 독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그가 햇살 타고 당신의 집 앞마당에 나비처럼 환생하는 꿈을 꾸길 바란다.”

 이중섭(1916~56)은 이미 신화 차원으로 소비된 화가다. 비범(非凡)·비련(悲戀)·유랑(流浪)·요절(夭折) 등 하늘의 별로 등극할 수 있는 전설의 주요 요소를 두루 갖췄다.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한 무연고자’로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누추하면서도 제법 유쾌한 삶을 누렸다. 아쉬운 건 그의 경쾌하면서도 비극적 일생이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극화돼 희화화 됐다는 것이다.

 최열씨는 피에로가 된 이중섭에게 온전한 그의 삶을 돌려주려 시도했다. 문헌에 입각한 실증 위주로 최대한 사료와 증언에 기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애썼다. 공중에 붕 뜬 풍선 인간을 땅에 발붙인 진흙 인간으로 바로잡는 일은, 주인공이 일개 화가였다 해도 한국 근현대사의 한 뼈대가 될 수 있는 엄정한 역사 바로잡기였다. 생전에 화가와 교유했던 모든 이들의 증언을 밭 삼아 그 이랑 곳곳을 쑤셔 알곡 하나하나를 주워 올렸다. ‘전작 도록’을 보여준다는 각오로 수집한 작품 이미지 편집도 눈여겨 볼만하다.

저자는 ‘이중섭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자 노력했다. 열일곱 문학청년 시절에 만나 오래 품어온 이중섭의 생애를 500여 종 문헌을 되새김하며 1년 6개월을 “미친 듯이 썼고”, 원고지 약 4000장에 토해냈다. 이중섭 정전(正典)은 이렇게 탄생했다.

 “최초의 목적은 ‘사실로 가득찬 일대기’”였으나, 거의 1000쪽 가까운 두툼한 실록(實錄)은 이중섭이 나고 자란 고향 평안도 민요 수심가(愁心歌) 한 구절로 매듭지어진다. “독행천리(獨行千里), 일생일거(一生一去). 홀로 걸어 천리 길, 한 번 나고 한 번 가네.”

 이 노래는 이중섭의 그림과 생애를 요약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이가 이 노래에서 몇 치나 떨어져 있을까.

[S BOX] 오산고보 간 이중섭은 민족주의자? 입시 낙방 탓

이중섭이 지상에서 보낸 40년 삶은 때로 소설 같다. 환상의 더께가 씌워져 엉뚱한 방향으로 윤색된 채 본질과 멀어진 부분이 꽤 된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이 저마다 바라보고 희망했던 이중섭이 그만큼 여러 얼굴의 인간이었다는 얘기다.

 대표 사례가 이중섭의 오산고등보통학교 진학에 대한 해석인데 민족정신을 기치로 내건 오산고보의 이념에 쏠려 선택했다고 알려져 왔다. 사실은 달랐다. 자유분방하던 청소년 시절의 중섭은 연이어 입시에 떨어졌고 이를 안타까워한 외할아버지가 친분이 있던 오산고보 설립자 이승훈 선생에게 부탁해 입학한 것이다.

 일본 도쿄 시절에 대학을 여러 차례 옮긴 배경도 왜곡됐다. 도쿄미술학교를 제쳐놓고 제국미술학교, 이어 문화학원으로 학교를 바꾼 까닭을 그의 민족정신과 연결하거나 관학파를 싫어하고 재야파(在野派)를 선호하는 기질로 풀이했다. 지나친 봐주기다. 그가 유학을 갈 시기에 도쿄미술대학의 입학 규정이 까다로워졌고, 이에 비해 들어가기 쉬웠던 제국미술학교가 대안이 된 것이다. 문화학원 전학도 초라한 성적표 탓에 정학 처분을 받은 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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