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휴전협정 조인|한표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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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은 결국 「로버트슨」차관보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협정에 대한 협조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휴전협정 조인 전에 이 확답을 얻어내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로버트슨」이 내한한 후 16일만인 53년7월11일 이·「로버트슨」공동성명이 발표됐다.
①우리는 포로들이 강압을 받아서는 안되며 일정기간이 지난 후 공산치하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 않는 포로는 남한에서 석방될 것이며 비공산주의 중공군의 경우 각자가 선택한 곳으로 보낸다는 우리의 결의를 재확인한다.
②양국 정부는 현재 협상이 진행중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합의했다.
③특히 우리는 최단 시일 내에 우리의 공동목표인 한국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려는 우리의 결심을 강조하고자 한다.
「로버트슨」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담긴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12일 이한, 15일 「아이젠하워」에게 전달했다.
휴전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한국측의 일대 양보였지만 그 대신 미국도 안보에 대한 한국의 불안감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미국의 이같은 이해로 인해 한국은 휴전에 대한 본래 입장을 완화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7월23일 「아이젠하워」는 한국부흥 6개년 계획안에 동의했고, 「덜레스」국무장관은 휴전 조인 후 한미수뇌회담개최를 제의했다.
그리고 7월27일에는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유엔군사령부의 「월리엄·K·해리슨」중장과 북괴군대장 남일은 12분만에 18건의 문서에 서명했다. 휴전협정문서는 다시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미 육군대장, 북괴군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에 의해 정식 서명됐다.
휴전회담이 열린 후 2년1개월, 6·25전쟁발발 후 3년1개월만에 이루어진 종지부였다.
인명사상이 유엔군측 33만명, 공산측 1백80만명에 이르고 전쟁비용이 유엔측만도 1백50억달러로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거의 맞먹었으며 특히 한국민의 주택손실·파괴가 60만호, 전쟁고아·부랑아 10만명, 전쟁 미망인 50만명이라는 막대한 희생도 보람없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허망한 휴전을 맞게됐다.
휴전협정조인으로 한반도에서 유엔의 군사적 행동은 끝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유엔의 처음 목표는 북괴의 남침을 격퇴하고 평화와 안정을 확고히 수립하는데 있었다.
즉 전쟁발발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직후 유엔은 침략격퇴 뿐만 아니라 「전한국의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적 정부」수립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중공군개업 후에는 유엔입장에 변화가 생겨 적군을 격퇴하고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재침략을 방지하는 쌍방합의만 이루어지면 유엔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수정됐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러한 입장 위에서 휴전협정을 모색하면서도 두 가지 원칙을 고수하는데 끈덕지게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침략자는 침략의 댓가로 어떠한 형태로든지 혜택을 받아서는 안되고 오로지 처벌을 받아야하다는 원칙이었다. 다시 말해 무서운 희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전쟁포로는 절대로 강제로 송환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었다.
미국은 이같은 원칙을 끝내 고수할 수 있었던 것 이외에 ▲군사분계선을 한국군과 유엔군의 안전에 유리하도록 38선 이북에 획정했고 ▲비무장지대를 설치한 것 등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한편 한국 입장에서 볼 때 북괴군을 격퇴하고 중공군을 몰아내어 한반도의 통일은 이룩하지 못했지만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비롯해 군사 및 경제원조를 받아내고 16개 참전국이 휴전에 즈음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휴전협정조인과 동시에 발표된 이 공동성명은 『또다시 유엔헌장에 도전하는 침략행위가 재개될 경우 우리는 다시 힘을 합쳐 즉각 이를 격퇴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만약 휴전협정에 대한 그같은 파기행위가 있을 경우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여 군사적 행동이 한국전선에만 국한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공산측에 경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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