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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7)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34)|이 대통령, 휴전반대 성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야콥·말리크」소련부외상 겸 유엔대표가 휴전협상을 공개적으로 제의한 것은 51년6월23일이지만 미국과 소련이 휴전에 관한 상호의견을 타진한 것은 약3주일 전이었다.
소련문제 전문가이며 민주당 외교의 기둥이었고 당시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있던「조지·캐넌」이「애치슨」국무장관의 요청을 받아「말리크」를 접촉, 휴전에 관한 양측 견해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해 5월31일 뉴욕의 부유촌인 롱아일랜드의 소련대사 별장을 찾아간「캐넌」으로부터 휴전용의에 관한 질문을 받은「말리크」는 신중한 검토를 약속했다고.
이 두 사람은 6월5일 다시 만났다.「말리크」는 한국에서 가능한 한 빨리 평화를 되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휴전원칙을 밝히고 소련은 참전국이 아니므로 협상 때는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중공이나 북한에 접근해보라는 사견도 개진했다.
미국은 막후 대소협상의 산물인 이 휴전방침을「리지웨이」유엔군사령관과「무초」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이 대통령은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고 이튿날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 대통령은 휴전문제에 관한 기본입장을 설명했다.『소련이 휴전을 제의한 것은 패배를 자인한 것이다. 무력으로 성취할 수 없던 것을 이제 와서 양면외교를 통해 이루어보려는 흉계임에 틀림없다. 그런 소련의 제안은 평화 안으로 인정할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이어 성명을 발표하여『한반도의 통일은 우리로서는 최소한의 요구다』고 주장하고『휴전회담이 있을 때 한국의 입장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 성명을 워싱턴 대사관과 유엔대표부에서도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 성명은 마치 휴전반대의 입장을 바꾸어 휴전협상에 가담할 용의가 있다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판단하여 이 성명을 각국 대표들에게 설명하면서 대한민국이 휴전에 찬성한다는 얘기가 아니다』고 강조하고『만일 한국이 휴전협상에 참석한다고 가정해도 그것은 우리 대표를 통해 좌담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의 휴전협상 결정에 낙담한 한국측으로서는 불과 2개월전 해임된「맥아더」장군의 대공 강경자세를 아쉬워했다.「맥아더」장군이 해임되지 않았던들 미국의 입장이 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는 생각에서였다.
「맥아더」장군이 해임된 것은 51년4월11일이었다. 그날 밤 갑자기 백악관 대변인이 자정에「트루먼」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다고 공표해 나도 의아스런 생각을 가지고 회견장에 나갔다.
「트루먼」대통령이 나타나 성명서를 낭독했다.『매우 섭섭한 얘기지만 내 판단으로서는「맥아더」유엔군사령관이 미 정부의 일단 수립된 정책에 대해 전적인 지지도가 결여돼 있다.』
해임발표시간을 자정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보다 13시간이 빠른 동경의 석간신문 발행시간을 감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장군은 불시에 해임됐어도 그의 평판은 대단했다. 오히려 그를 해임한「트루먼」대통령의 인기는 폭락할 대로 폭락했다.
「맥아더」가 귀국해 뉴욕에서 퍼레이드가 벌어졌을 때 7백만명의 인파가 그를 환영했다. 2차 대전의 영웅「아이젠하워」장군이 45년 유럽연합군총사령관으로 개선할 때 환영인파가 3백50만명이라고 해서 대기록으로 돼있었다.
「맥아더」는 상·하원의 초청을 받아 의회에서 연설도 했다. 시민으로서 의회에서 연설하는 것은 유래가 없었던 일이다.
「맥아더」는 몇 군데 환영식에 참석한 후 4월부터 그의 해임과 관련된 미상원외교·국방의 합동청문회에 2개월간 출석, 증언했다.
청문회에는「맥아더」외에「브래들리」합참의장·「칼리스」육군참모총장·「서먼」해군참모총장·「벤덴버그」공군참모총장이 나왔고 행정부에서는「애치슨」장관도 출석했다.
청문회는 한마디로「트루먼」대통령을 보좌하는 외교·군사참모 대「맥아더」의 싸움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 청문회를「대 논쟁」(The Great Debate)이라고 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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