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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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날 휴화산이 폭발하듯 그이의 만학결정이 내려졌다. 학교를 졸업한 뒤 군과 직장에서 보낸 지난 10여년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워보려는 그의 지난 7개월여의. 고군분투. 남의 이야기로는 그렇게 쉽게 얘기했던 「미국유학」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다.
당사자의 무서운 각오와 인내가 있었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와 과정은 주위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인 갈등을 주는 것이었다.
남편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되면 나도 평소 관심이 있던 신문방송학을 기회 봐서 계속해 보겠다던 생각은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던가. 시작부터 시련에 부딪치자 용기가 없어졌다.
특히 우리의 완화되는 문호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미대사관의 인터뷰 대열에 서있는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는 것을 보며 나는 어떠한 설움 비슷한 것으로 앵돌아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다.
이 경험이 앞으로의 인생살이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되들아 생각을 해보기도 여러번. 그러다 보니 기적처럼 여권과 비자를 받았고 출국 일이 결정되자 다시금 크나큰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혼 7년이 되도록 아직도 우리 울타리가 되어주시던 시댁과 친정부모님을 두고 멀리 떠나가 우리끼리 살아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새삼 양쪽 부모님께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 된다.
크고 어렵기만 하던 친정아버지가 나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왜소해지시는 것, 건강한 체구와 금테안경 뒤의 경계의 눈초리로 갓 결혼한 나를 은근히 압도시키던 시아버님의 어느새 희게 변한 머리칼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엄마는 레그혼이었던가봐』 남동생의 버릇없는 놀림처럼 연년생의 8남매를 초인적인 힘으로 키워낸 친정엄마의 주름진 목에 새삼 눈길이 가니 슬픈 마음이다. 또 며느리에게도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던 시어머님의 은근과 끈기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다.
결혼한지 7년째 6살 3살의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아직 철부지 여대생시절처럼 지내오던 내가 이젠 정말 조그만 내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야할 시점에 서게된 것이다. 우선 불안감이 앞선다.
이제는 결혼해서부터 이 종류 저 종류의 피해의식에 젖어들기 일쑤였던 극히 감정적이었던 내 성격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나이 60에 즈음하여 자식들을 외국으로, 그것도 근5년 이상이나 떨어져 살아야할 석별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부모님들도 새삼 착잡해지시는 것 같다. 남편과 나는 되도록 부모님과 만날 기회를 자주 만들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마음속에 품은 이야기가 좀체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모든걸 안으로 삭여야 미덕이 되는 우리의 습관 탓일까. 비감한 마음뿐.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해야 그분들의 허한 마음의 공백을 메워드릴 수 있을지, 그럴듯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이점은 친정엄마를 닮은 것 같다. 아직까지는 양쪽부모님들께 완전한 부모이기를 먼저 기대해왔던 나는 이제부터라도 우선 완전한 딸이나 며느리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되었다.
또 30세가 넘어 새삼 어렵고 힘든 공부를 시작한 남편을 돕고 두 아이를 열심히 키위 양쪽 부모님의 심려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겠다고 다짐해본다. 씩씩하게 열심히 살다 다시 양쪽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겠다는 결심도 해본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진달래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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