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스트러와 9살 조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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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가한 때, 혹은 혼자 집에 남겨져 쉬고싶을 때 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고마움을 이때만큼 절실하게 느낄 때가 없다.
3년전 미국에 갈 행운이 생겼다. 그때 생각하기를 다른 것은 몰라도 미국에 있는 유명한 오키스트러의 연주와 메트러폴리턴에서 행해지는 오페라를 꼭 보아야지 했다. 이곳 부산에서도 서울에 유명한 오키스트러나 연주자가 오면 일부러 비행기 타고 서울 가서 음악을 듣고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렇게는 못 할지라도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미국에 닿고 며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클래식 연주 시즌이 전부 끝나버렸다. 난 당황해 하고, 속상해 하고, 약간은 신경질을 내기도 하면서 그런 것도 알아놓지 않은, 먼저 가 있던 남편을 원망했다. 뉴욕에 몇 년째 살면서 음악회 한번 구경 못했던 동생은 보다 못해『누나, 그래도 연주회가 있긴 있을 겹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했다.
그러면서 뉴욕타임즈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연주회 소식을 알아보아 주었다. 다행스럽게도「유진·오먼디」의 필라델피아 오키스트러를 카네기홀에서, 그리고 은퇴했지만 특별 지휘하는「번스타인」의 뉴욕 필하머니를 링컨센터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남편과 동생 내외, 그리고 9살난 조카까지 같이 가야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를 밤에 혼자 아파트에 남겨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부산에서 음악회 때마다 청중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 남의 음악감상을 완전히 망쳐놓는 것을 하도 많이 보아 왔기에 아이들을 음악회에 데리고 간다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모처럼의 좋은 기회에 음악감상 잘해야 될텐데 조카녀석이 몸을 뒤틀고 지리하게 생각하면 거기 마음 쓰느라 음악감상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비록 의자의 군데군데가 낡았지만 카네기홀에서의「차이코프스키」교향곡 5번 연주는 너무나 훌륭했다.
「오먼디」가 만들어 내는 그 선율 속에 난 완전히 파묻혀 있었고 염려했던 조카는 예민한 나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링컨센터에서도 조카는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까지도 잘 참아내 주었다. 난 넥타이에 정장한 그가 꼭 꼬마신사 같아 대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음악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게 조용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가 취해야할 모든 예의범절을 그가 완전히 훈련받았기 때문이었다. 난 지금도 여고 때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항상 때와 장소를 가려 행동할 줄 모른다고 단체로 꾸지람 듣던 말씀을 기억한다. 우리에게 오히려 부족한 것은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이젠 우리도 물질적으로는 많이 풍부해진 셈이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그 귀하고 비싸던 옷들이 요즈음 대학생들은 3만원만 가지고 나가면 한 보따리 사올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만의 해결로 과연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공공물건을 아낄 줄 알며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보다 바람직한 세상일 것이다. <김완희(부산시 부산진구 당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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